사한제(司寒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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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설행된 국가 제사로서, 한겨울과 초봄에 추위를 관장하는 북방의 신 사한(司寒)에게 향사(享祀)하던 의례.

개설

현명(玄冥), 혹은 현명씨(玄冥氏)라고도 불리는 사한신에게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원하는 기온(祁溫), 날씨가 추워지기를 기원하는 기한(祁寒), 눈이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설(祈雪) 및 순조로운 장빙(藏氷), 개빙(開氷) 등을 기원하기 위해 거행하던 제사이다. 조선시대의 국가 오례 중 길례에 속하며, 소사(小祀)로 분류되었다. 정해진 날짜가 없는 제사로서, 음력 12월 계동(季冬)에 얼음이 얼기 시작할 때와 춘분(春分)에 얼음이 녹기 시작할 때에 길일을 택하여 남교(南郊, 서울 용산구 옥수동 일대)의 사한단(司寒壇)에서 거행하였다.

연원 및 변천

사한 제사는 본래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기원전 538년(노 소공 4)에 검은 소와 검은 기장을 바치면서 사한신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최초로 확인된다. 추위 조절과 한파 극복 및 국가에서 사용할 얼음의 순조로운 채취·저장과 얼음창고를 여는 개빙·여름에 얼음을 나눠주는 반빙(頒氷)을 원활하게 이룰 수 있도록 기구하는 의식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기한제(祈寒祭)’ 또는 ‘동빙제(凍氷祭)’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사(高麗史)』에 고려초기부터 음력 12월에 얼음이 얼기 시작할 때와 춘분에 얼음이 녹기 시작할 때에 각각 사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는데, 실제로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국가 오례 중 길례로 분류되었고, 규모는 소사이며 정해진 날짜가 없는 제사로서 한겨울에 얼음이 얼기 시작할 때와 초봄에 얼음이 녹기 시작할 때에 각각 길일을 택해 남교의 사한단에서 거행하도록 지정되었는데, 시일과 의식·절차가 고정되기까지 몇 차례의 개정과 시정 과정을 거쳤다. 조선초기인 1403년(태종 3) 정월에 사한 제사의 축사(祝史)를 임명하지 않은 일이 적발되어 의정부(議政府)의 이방녹사(吏房錄事) 등이 탄핵을 당하였고, 이를 사헌부(司憲府)의 과실이라 여겨 왕이 직접 사헌부에 해명과 사죄를 명한 일이 있었다(『태종실록』 3년 1월 9일). 이는 국가 제사를 엄격하게 관리·감독하여 어느 하나도 소홀함이 없도록 단속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1413년(태종 13)에는 고려시대의 제도를 따라 사한 제사의 규모를 소사로 정하였다. 1448년(세종 30) 11월에는 사한제가 음력 12월의 월령에 들어 있는 데 비해, 실제로 얼음이 어는 것과 얼음을 저장하는 작업은 대체로 매년 11월에 진행되는 관계로, 사한 제사의 설행 시기가 실제 자연 절기와는 잘 맞지 않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후부터는 매년의 기후 변동에 따라 적합한 날짜를 택일하여 보다 유연하게 사한 제사를 설행하도록 명하였다(『세종실록』 30년 11월 9일). 이후 기온이나 기한을 목적으로 상황에 적합하게 사한제를 거행하였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발견된다.

한편 1767년(영조 43) 초봄에 개빙을 기원하는 사한제를 올릴 때 영조가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구망(句芒)·축융(祝融)·욕수(蓐收)·현명(玄冥)·후토(后土)·후직(后稷)의 여섯 신령에게 강우를 기원하면서 올리는 제례인 우사(雩祀)에서 현명씨는 제5위 신령에 해당되어 우사와 사한제의 공동 대상이 되는데, 우사에서는 수결과 함자인 화압(畵押)을 사용하는 반면 사한제에서는 화압을 사용하지 않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동류의 신에게 올리는 제사 의식에서 이처럼 세부 운용을 달리하는 점은 잘못이라고 비판하고 시정을 명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시기까지 영조 때에 고정된 양식이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다가, 1908년(융희 2)에 칙령에 의해 폐지되었다.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춘관통고(春官通考)』 등에 따르면, 사한제는 향관(享官)의 3일 동안의 재계(齋戒)를 시작으로, 향사 1일 전부터 제례에 필요한 각종 물품과 시설물을 진설하고, 향사 1일 전의 희생 제물을 살피는 성생기(省牲器), 향사 당일 헌관이 잔을 올리는 초헌(初獻)·아헌(亞獻)·종헌(終獻), 복주를 나눠 마시는 음복(飮福), 변과 두를 하나씩 옮겨 두는 철변두(徹籩豆)의 순으로 진행한다고 되어 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사한제는 기우제·기설제·기청제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농사의 풍년을 기구하는 농경의례적 측면을 지닌 동시에, 기후 변동과 자연 이변으로 야기되는 피해를 줄이고자 하는 현실적인 희망과 필요에 의해 유지된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여름의 더위를 식히고 각종 국가 제례와 잔치에 요긴하게 사용되는 얼음을 무사하게 채취하고 저장·분배하기 위한 제의(祭儀)의 의미도 지녔기 때문에 고려시대에 간헐적으로 개정·시행된 장빙법(藏氷法)과도 관련이 있으며, 조선시대 장빙고(藏氷庫)의 운영과도 긴밀하게 연계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고려초기인 1036년(고려 정종 2) 4월과 6월에 얼음을 진상하는 시기를 입하절(立夏節)로, 나라에서 여름철에 문무백관에게 얼음을 나누어주던 일을 하는 반빙(頒氷) 시기를 6월부터 입추까지로 정하였으며, 반빙의 대상을 문하시중(門下侍中) 등 17인으로 제한하여 10일마다 한 번씩 정해진 수량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1297년(고려 충렬왕 23) 6월에는 얼음에 대한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장빙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후기에 장빙법이 실시되었던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초기에는 다시 장빙을 엄격하게 제한하여 국가가 일괄적으로 관장하게 되었고, 얼음을 전문적으로 저장하기 위한 장빙고로서 창덕궁 요금문(曜金門) 안의 내빙고(內氷庫)와 4대문 밖의 2처에 외빙고(外氷庫), 즉 동빙고(東氷庫)와 서빙고(西氷庫)를 새롭게 설치하였다. 서빙고는 건국 초기에 둔지산(屯智山, 현재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산록에 설치되었고, 동빙고는 1396년(태조 5)에 남교두모포(豆毛浦, 현재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 설치되었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둔지산 밑 서빙고 부근(현재 용산구 동빙고동)으로 옮겼으며 1898년(광무 2)에 폐지되었다. 동빙고에 저장된 얼음은 국가의 제향과 잔치에 주로 사용되었고, 서빙고에 저장된 얼음은 궁중의 각 관아 소속 백관들 및 환자와 죄수에게까지 분배되었다. 해마다 7~8월 무렵 장빙고의 제초 작업을 필두로 장빙 준비를 시작하여 11~12월에 관련 일 처리에 필요한 규정[事目]과 빙미(氷米)를 마련하고 길일을 택해 사한제를 올린 뒤 추운 날을 골라 얼음을 채취·운반·보관하였다. 또한 이듬해 봄에 빙고를 열고 겨우내 얼음이 제대로 보관되었는지 검사한 뒤 규정에 따라 반빙하였는데, 반빙 시기는 음력 3월 1일부터 10월 상강일(霜降日)까지였고, 대상에 따라 반빙 기간과 공급 수량도 각각 달랐다. 이때 상강일은 이십사절기의 하나로, 아침과 저녁의 기온이 내려가고,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으로 대략 10월 23일경을 말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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