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청단령(鴉靑團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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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이나 원자(元子), 왕세자, 문무백관이 입던 아청빛 단령.

개설

아청단령(鴉靑團領)은 아청빛의 단령으로, 여기서 단령은 깃을 둥글게 만든 관복을 이르는 말이다. 아청색을 흑색이라고도 하였으므로 아청단령을 흑단령(黑團領)·흑원령(黑圓領)·흑원령포(黑圓領袍)라고도 불렀다. 아청단령은 착용자의 신분과 용도에 따라 세 종류로 분류된다. 왕의 아청단령은 소복(素服) 중에 입는 예복의 하나였고, 원자와 왕세자의 아청단령은 상복(常服)이었으며, 문무백관의 아청단령은 예복으로 사용되었다.

왕은 중국으로부터 고명(誥命)을 받기까지 이 옷을 입었다. 대체로 선왕(先王)이 사망한 직후에 해당되는 시기였다. 간혹 황제의 칙서를 받을 때 논란이 되어 무늬가 있는 흑원령포를 입기도 하였지만, 왕이 상중(喪中)에 입었던 아청단령은 무늬와 흉배 장식이 없는 것이 원칙이었다. 북교단(北郊壇)에 나아가 제사를 지낼 때나 기우제를 지낼 때도 흑원령포, 즉 아청단령을 착용하였다.

원자나 세자의 아청단령은 평상시 시사복(視事服)이나 서연복(書筵服)으로 착용한 상복이었다. 문무백관의 아청단령은 상참(常參)이나 조참(朝參), 예연(禮宴) 등에 예복으로 입는 단령이었다. 따라서 원자나 세자, 문무백관의 아청단령은 왕의 것과는 달리 무늬와 흉배 장식이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연원 및 변천

왕은 상중 졸곡 전에 중국으로부터 고명을 받기 전에 아청단령을 입었는데, 그 제도는 『세종실록』「오례의」에서 확인된다. 왕은 고명을 받을 때 이외에도 대한제국 말까지 다양한 제례나 기우제 등에 아청단령을 입었다. 세자가 아청단령을 입기 시작한 것은 성종대부터이다. 1488년(성종 19) 3월, 당시 세자의 복색으로 사용하고 있던 녹색이 간색(間色)이므로 아청색으로 고치자는 논의가 일어나면서 세자의 복색으로 사용하게 되었다(『성종실록』 19년 3월 21일). 세자는 아청곤룡포를 입었다고 하는 것이 옳은데, 아청곤룡포란 아청단령에 사조룡(四爪龍)의 흉배와 견화를 장식한 것이다.

아청단령은 원자의 관복이기도 하였다. 1665년(현종 6) 원자가 보양관(輔養官)과 상견례 할 때 동계(童髻)에 옥잠(玉簪)을 꽂고, 흉배를 장식한 아청단령을 입고 옥대(玉帶)를 띠었으며, 흑화자를 신었다고 하였다(『현종실록』 6년 9월 3일). 아청단령은 문무백관의 의례용 관복으로도 사용되었다. 세종대까지 조관들은 여러 색상의 단령을 상복, 시복이라는 이름으로 착용하고 있었다.

1446년(세종 28)에는 조관들의 복색이 문란하다고 여겨, 조계(朝啓)나 동궁 조참(朝參) 등과 같은 의례에 검게 염색한 조의(朝衣)를 착용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백관의 아청단령, 즉 흑단령의 시작이다. 특히 당상관 이상은 단자(段子)나 사(紗)·나(羅) 등을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당하관은 조선에서 생산되는 옷감을 사용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8년 1월 23일 2번째기사).

1454년(단종 2) 12월 1일부터 모든 색상의 단령에 흉배를 달았으나(『단종실록』 2년 12월 1일) 세조대 이후로는 흑단령에만 흉배를 다는 관행이 정착되었다. 17세기 후반 이후 19세기 중반까지는 아청색 대신 짙은 초록빛인 유록색·현록색이 사용되었으나, 고종대부터는 아청색 흑단령이 다시 사용되었다. 그 후 1900년(광무 4) 4월 17일 칙령에 의해 문관복이 구미식(歐美式) 관복으로 바뀌기 전까지 의례용 단령으로 사용되었다(『고종실록』 37년 4월 17일).

형태

아청단령은 왕이나 세자, 문무백관의 것이 모두 같은 형태였으며, 단지 신분과 용도에 따라 색상과 소재가 달랐다. 또한 시대에 따라 깃 너비와 깊이, 소매의 길이와 너비, 옆선의 길이, 윗옷의 양쪽 겨드랑이 아래에 대는 딴 폭 무(武)의 양식과 길이 등에 변화가 있었다.

왕의 아청단령은 무늬가 없고 흉배와 견화 장식이 없는 단령이었고, 원자의 것은 흉배와 견화는 없지만 아청 비단에 운문이 있었다. 세자의 경우에는 사조룡의 용보(龍補)가 달린 운문 아청단령이었다. 또한 문무백관 중 당상관은 무늬 있는 아청색 비단의 단령에 흉배를 장식하였다. 당하관은 무늬 없는 아청색 단령을 착용하였는데 초기에는 흉배를 사용할 수 없었으나, 숙종대에는 6품까지, 영조대에는 9품까지의 관원이 흉배를 사용하였다.

단령의 형태를 보면 둥근 깃에 좌우 옆선에는 트임이 있고, 그 트임에는 옷감 한 폭 정도의 커다란 무가 달렸다. 소매의 길이는 충분히 길어서 손이 보이지 않았으며, 소매통은 조선전기에는 좁았으나 점차 넓어졌다. 16세기 전반까지는 진동 너비와 거의 비슷한 정도의 통수(筒袖)였으나, 16세기 후반부터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하여 17세기 초반에는 45㎝ 전후, 17세기 중·후반에는 60㎝가 넘는 커다란 두리소매라고 하는 광수(廣袖)로 변하였다. 단령의 무는 조선전기부터 말기까지 다중 안주름형에서 대소 안팎주름형, 밖주름형, 뻗침형, 단추고정형, 상침고정형으로 변하였다. 따라서 단령의 무 양식을 통해 그 시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용도

1545년(명종 11)에는 왕이 즉위한 후 고명을 받기 전까지는 곤룡포를 입지 않고 원령포를 입는다고 나와 있다[『명종실록』 즉위 11월 17일 3번째기사]. 곤룡포와 원령포의 차이는 용보를 장식하였는지의 여부에 따라 구분된다. 고명을 받기 전 영명(迎命)을 위하여 입는 아청단령 제도는 『세종실록』「오례의」에 명시되어 있다. 국상 졸곡 전에 고명이 있으면 왕은 익선관과 무문무흉배아청단령(無紋無胸背鴉靑團領), 흑정소옥대(黑鞓素玉帶), 흑화 차림을 한다. 만약 졸곡 후에 고명이 있으면 흉배를 장식한 아청단령에 홍정옥대 차림으로 모화관에 나갔다.

무문무흉배아청단령은 무양흑단령(無揚黑團領), 무양흑원령(無揚黑圓領), 무양흑원령포(無揚黑圓領袍)라고도 하였다. 상중 공제 후의 시사복(視事服)으로도 착용하였는데 무양흑원령포에 익선관, 청정옥대를 착용하였다. 1725년(영조 1) 국왕이 북교단에 나아가 제사 지낼 때 익선관과 흑원령포, 옥대, 흑화 차림으로 제사지냈다고 한다.

1732년(영조 8)에는 기우제를 지낼 때 흑원령포에 옥대, 흑화 차림을 하였다(『영조실록』 8년 6월 5일). 또 1752년(영조 28)에는 상중에 칙사를 맞이하고 보낼 때도 무양흑원령포를 착용하였다(『영조실록』 28년 1월 30일). 또 황제의 기일(忌日)에 망배례(望拜禮)를 지낼 때, 선왕의 기일을 맞아 향과 축문을 전할 때도 착용하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조선후기에는 반가의 사례(私禮)에 도포(道袍)를 사용하였지만, 조선전기에는 아청단령을 사례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제사나 혼례 때 관리들은 관복인 사모와 아청색 단령을 사용하였는데,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도 혼례 때에는 신랑이 변함없이 초례청에서 예복으로 단령을 입었다.

참고문헌

  • 『청파극담(靑坡劇談)』
  • 『학봉집(鶴峯集)』
  • 경기도박물관, 『전주이씨묘 출토복식 조사보고서』, 경기도박물관, 2001.
  •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 『정사공신 신경유공 묘 출토복식』, 단국대학교출판부, 2008.
  • 이은주·조효숙·하명은, 『17세기의 무관 옷 이야기』, 민속원, 2005.
  • 이은주, 「한국전통복색에서의 청색과 흑색」, 『한국의류학회지』 Vol.18 no.1, 1994.
  • 한국문화재보건협회, 『한국의 복식』, 한국문화재보호협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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