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양관(輔養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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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두세 살부터 다섯 살 정도의 원자·원손의 교육을 맡았던 보양청(輔養廳) 소속의 관원.

개설

조선시대 보양관(輔養官)은 원자 또는 원손이 말하고 걷기 시작하는 두세 살부터 읽고 쓰는 교육을 받는 다섯 살 사이의 약 3년 동안 원자·원손의 말과 행동·세계관을 바르게 잡아주는 선생님이었다. 조선시대 보양관은 인종이 원자로 있을 당시인 1519년(중종 14)에 이장곤·조광조·이자·남곤을 차출하면서 시작되었다. 보양관은 양반 관료를 대표하는 삼정승과 자타가 공인하는 명망 높은 유학자가 맡았다. 보양관은 행동과 말로 가르치는 일종의 생활 교육, 모범 교육을 실시했다. 조기에 인간의 말과 행동을 바르게 형성하고자 심사숙고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지혜가 만들어낸 제도가 보양관이었다.

담당 직무

보양관이 근무하는 관청은 원자보양청 또는 원손보양청이라고 하였다. 보양청은 원자 또는 원손이 생활하는 곳 가까이에 있었다. 보양청에는 보양관뿐만 아니라 서리와 심부름꾼을 비롯하여 필요한 인력들이 배치되었다. 보양관들은 날마다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당번을 정해 번갈아가며 출근했다. 경종이 원자였을 때 교육을 담당했던 보양청의 일기에 의하면 영의정권대운은 보양관들의 교육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전부터 세자에 책봉되기 이전에 의례 보양관이 있었습니다. 원자는 아직 강보에 싸여있어 보양관을 뽑는 것이 너무 빠른 듯하지만 밖의 논의는 모두 뽑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지금 보양관이 직접 보도(輔導)하고 가르칠 수는 없지만 옷 입고 밥 먹을 때 가끔씩 들러 본다면 보탬이 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영의정권대운이 말한 보양관의 교육 방법만으로도 어린 원자나 원손에게 중요한 교육이 되었다. 예컨대 보양관들이 원자 또는 원손을 볼 때는 스승과 제자의 예를 행하고 보았다. 그러므로 강보 속의 원자 또는 원손은 보양관을 볼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제자의 예를 행하고 배웠다. 또한 보양관이 원자 또는 원손을 만나 건네는 한두 마디의 덕담이나 원자 또는 원손 주변의 환관·궁녀에게 행하는 훈계, 원자의 옷차림이나 행동거지에서 예에 벗어나는 사항이 발견될 때 이를 고쳐주는 것 등이 모두 교육이었다.

서너 명의 보양관들은 순번을 정해 번갈아 원자 또는 원손을 보았다. 원자 또는 원손이 두세 살 이전일 때는 보통 열흘에 한 번 또는 보름에 한 번 정도로 보다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만나는 횟수를 늘렸다. 그러다가 원자 또는 원손의 나이가 다섯 살가량 되면 강학청(講學廳)을 설치하고 보양관을 사부라 바꿔 불렀다.

변천

중종 때 처음 선발된 보양관은 1556년(명종 11)에 순회세자가 원자로 있을 때 안현·이준경·조사수·임호신을 선발하여 그 전통이 계승되었다. 이후 선발 인원은 많게는 7명까지 차출한 경우도 있었는데, 1666년(현종 7) 숙종이 원자로 있을 때 송시열·송준길·김수항·박장원·김좌명·조복양·이정기가 선발되었다. 보양관을 선발하는 전통은 계속 이어져 1874년(고종 11)에 순종이 원자로 있을 때에는 김병덕·이돈우·송근수를 선발하였다. 『육전조례(六典條例)』에 의하면 보양청은 원자의 경우 시강원(侍講院)에 설치하고 원손의 경우 궐내 관가 건물[公廨]에 설치하였다. 갑오개혁 때 보양청은 시강원에 통합되었다가 일제 때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강학청일기(講學廳日記)』
  • 『열성진강책목록(列聖進講冊目錄)』
  • 『시강원지(侍講院志)』
  • 『열성조계강책자차제(列聖朝繼講冊子次第)』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강태훈, 『경연과 제왕교육』, 재동문화사, 1993.
  • 김문식·김정호, 『조선의 왕세자 교육』, 김영사, 2003.
  • 신명호, 『조선왕실의 자녀교육법: 혜경궁 홍씨, 인수대비, 사주당 이씨에게서 조선시대의 총명하고 어진 자녀 교육법을 배운다』, 시공사, 2005.
  • 육수화, 『조선시대 왕실교육』, 민속원, 2008.
  • 이기순, 「인조조의 ‘반정공신’ 세력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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