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사(서울 원각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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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발원하기 위해 도성 안에 창건한 절.

개설

원각사(圓覺寺)는 세조대에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원각법회를 하던 중 이적이 일어났다고 세조에게 보고함으로써 창건된 사찰이다. 경내에 여러 전각과 더불어 경천사탑을 모본으로 만든 석탑과 대종을 조성했다. 경복궁과 인접하여 중국과 일본의 사신이 자주 찾았다. 창건 이후 지속되는 대신들과 유생들의 철폐 요구에도 왕실의 지원으로 유지되다가 연산군대에 음악을 관장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원각사에 옮기도록 함으로써 사실상 폐사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원각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조선전기 사찰이다. 이 절은 세조대에 창건되어 연산군대에 철폐되었으므로 약 50여 년 간의 역사에 불과하지만 그 창건과 철폐 과정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조선전기 불교를 둘러싼 왕실과 신하의 대립을 잘 보여준다.

원각사의 창건을 주도한 사람은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이다. 효령대군이 회암사(檜巖寺)에서 원각법회(圓覺法會)를 설행할 때 여래가 나타나고 사리가 분신(分身)하는 등 이적이 일어났다고 고하자 세조가 이러한 기이한 상서(祥瑞)는 다시 만나기 어려우므로 흥복사(興福寺)를 다시 세워 원각사로 삼고자 한다고 하였다(『세조실록』 10년 5월 2일). 흥복사는 건국 초에 원각사 터에 세워져 있던 절로서 국가에서 주관하는 각종 재(齋)가 개설되었는데 세종 때 혁파되어 음악에 관한 행정을 관장하는 관습도감청(慣習都監廳)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조가 그 흥복사가 있던 자리에 다시 법당을 만들어 원각사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원각사의 창건이 국왕의 명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공사 현장에는 관리와 군인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1464년(세조 10) 6월에 마침내 근처 인가 200여 채를 모두 철거하고 청성위(靑城尉)심안의(沈安義)와 이조 판서한계미(韓繼美)가 공사 감독을 맡고 2,100명의 군인이 조영에 동원되었다(『세조실록』 10년 6월 5일). 그리고 50명의 장인을 동원하여 대종(大鐘)과 석탑(石塔)을 조성하였다(『세조실록』 10년 7월 12일). 대종을 주조하는 데 소요되는 50,000근의 동(銅)은 서울과 지방에 분담하여 거두었고(『세조실록』 10년 6월 16일), 조영에 필요한 목재는 충청도에서 벌목하였다(『세조실록』 10년 8월 4일).

세조와 효령대군은 원각사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이적이 나타났다고 선전함으로써 원각사의 창건을 반대하는 여론을 잠재우고 또 국가를 위해 상서로운 일임을 알리고자 하였다. 효령대군은 공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원각사 위에 황운(黃雲)이 둘러싸고 천우(天雨)가 사방에서 꽃피어 이상한 향기가 공중에 가득 찼으며 또 서기(瑞氣)가 회암사에서부터 서울까지 잇달아 뻗쳤다고 하였다(『세조실록』 10년 6월 19일). 또 신하들이 원각사에 상서로운 기운이 있었다고 세조에게 아뢰자 강도 외의 죄를 짓고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방면하였다(『세조실록』 10년 9월 25일).

이렇게 해서 1464년 12월에 대종을 먼저 완성하여 감주제조(監鑄提調)와 낭관(郎官)에게 상을 내렸고(『세조실록』 10년 12월 12일), 공사를 시작한 지 1년이 되는 1465년(세조 11) 4월 7일, 즉 사월초파일 하루 전에 완공을 알리는 경찬회(慶讚會)가 베풀어졌다. 이 행사에 세조가 직접 참석하였으며, 승려 128명이 참석하여 『원각경』을 펼쳐보고, 20,000명의 외호(外護)하는 승려에게 공양을 대접하였다(『세조실록』 11년 4월 7일). 이듬해 1466년(세조 12) 7월에는 절에 봉안할 백옥불상(白玉佛像)이 완성되자 함원전(含元殿)에서 점안법회를 개최하였다(『세조실록』 12년 7월 15일). 또 1467년(세조 13) 사월초파일에는 경천사(敬天寺) 석탑을 모형으로 만든 10층의 석탑이 완공되자 대대적인 연등회를 열고 낙성식을 거행하였다(『세조실록』 13년 4월 8일). 탑이 완공되면서 이제 원각사는 전체적인 대가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 예종~성종대

절이 창건된 후에도 사리가 서기(瑞氣)를 나타내거나 분신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는데 이때마다 신하들은 왕에게 하례를 올리는 것이 상례였다. 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예종은 즉위년인 1468년 10월 이 절에 행차하였고(『예종실록』 즉위년 10월 13일), 12월에는 세조의 백일재(百日齋)를 베풀고 분향한 뒤 쌀 50석을 하사하고 강도와 절도 외에 유배형 이하의 죄인을 석방하고, 호위하는 병사에게 3일간의 휴가를 주었다(『예종실록』 즉위년 12월 16일).

예종을 이어 즉위한 성종 역시 원각사에 대한 지원을 지속하고 각종 재를 베풀었다. 매년 소금 10석, 말장(末醬) 6석 5두, 노란콩[黃豆] 48석, 삼베[麻布] 10필, 무명[綿布] 20필을 지원하였다(『성종실록』 18년 1월 23일). 그리고 예종의 백일재를 베풀고, 기청제(祈晴祭)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목불(木佛)이 돌아섰다는 이적에 대한 소문이 일어나 도성의 사대부 부녀자들이 앞 다투어 시주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1년 5월 25일). 게다가 명나라 사신들이 가서 향을 사르고 시주하였으며(『성종실록』 14년 8월 2일), 일본 사신들도 반드시 원각사를 방문한 후에 돌아갔다고 한다(『성종실록』 25년 5월 7일).

하지만 성종대부터 신하들은 원각사의 폐단에 대해 상소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대종을 치는 것이 음기(陰氣)를 도우는 일이라며 종을 치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년 1월 11일). 결국 성종은 평소에는 종을 치지 말고 불사 때는 미리 알리고 치라고 하였다(『성종실록』 1년 9월 14일). 그리고 목불이 돌아섰다는 소문이 나자 대신들은 원각사 승려가 인심을 현혹하는 말을 퍼뜨렸으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종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유생들이 이 사건을 빌미로 절을 폐사하라는 상소를 올리자 오히려 상소를 올린 유생들을 감옥에 가두고 국문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11년 5월 28일). 결국 성종은 원각사 승려들을 국문하도록 하였으나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의 요청으로 모두 석방하였다(『성종실록』 11년 5월 30일). 이후에도 대신들과 성균관 유생들은 계속해서 원각사 승려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성종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성종실록』 11년 6월 16일).

이러한 성균관 유생들과 원각사 승려의 대립이 지속되다가 결국 유생들이 원각사에 들어가 승려들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482년(성종 13) 5월에 유생 4명이 원각사에 들어가 원각사 연못에서 목욕하고 승려를 폭행하는 등 난동을 부렸던 것이다. 이에 유생들을 의금부에 가두어 처벌하였다(『성종실록』 13년 5월 13일). 그리고 원각사에 화재가 나서 수리할 때 왕실에서 기와와 목재를 제공하자 대신들은 원각사 중수를 지원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성종은 기와와 목재만을 제공하고 군졸은 사역하지 않도록 하겠다고(『성종실록』 19년 윤1월 14일) 하였지만 대신들의 요구는 그치지 않았다. 결국 성종은 신하들의 집요한 요구에 기와와 목재도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성종실록』 19년 윤1월 18일). 이후에도 원각사의 보수에 왕실의 지원이 있을 때마다 대신들은 극력 반대하였다.

(3) 연산군대

연산군대에 이르러 원각사의 불사에 대한 대신들의 반감은 한층 더 거세졌다. 원각사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경전을 새기는 인경(印經) 불사에 대해서도 불가(佛家)의 허황된 말을 물리치고 유가(儒家)의 바른 말을 숭상하기 위해 인경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유생들은 상소까지 하였다. 결국 연산군은 대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연산군일기』 1년 7월 5일). 그리고 마침내 원각사의 폐사에 대한 논의가 성균관의 이전(移轉)과 관련하여 이루어졌다. 1504년(연산군 10)에 연산군은 성균관이 궁궐 담장에 가까워 국가의 체모가 편하지 못하고 원각사는 바른 도(道)가 아니므로 폐사하여 그 자리에 성균관을 옮기라고 명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7월 10일). 이때의 명은 왕실의 반대로 다음 날 취소되었지만 몇 달 후에 원각사 승려들을 모두 쫓아내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12월 26일). 그리고 다시 몇 달 후에 음악을 관장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원각사에 옮기도록 하여 사실상 폐사를 명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2월 21일).

(4) 중종대 이후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한 후에 대비가 원각사를 복립하고자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중종실록』 2년 1월 10일). 또 한때 한성부의 관청을 원각사로 옮기려는 논의도 있었고(『중종실록』 5년 1월 12일), 신하들의 회의 청사인 의득청(議得廳)으로 삼으려는 논의도 있었다(『중종실록』 7년 7월 24일). 그러나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원각사 터에는 석탑과 비석만 남아 도둑의 소굴이 되었다고 한다(『중종실록』 20년 12월 14일). 명종대에 문정왕후가 원각사를 다시 복립하려고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결국 실패하였다(『명종실록』 9년 9월 2일). 이렇게 해서 조선말기까지 빈터로 남아 있던 이곳에, 1897년 대한제국의 영국인 고문이었던 브라운의 설계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공원이 들어서게 되고, 1919년 3·1운동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참고문헌

  •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서 4 서울』, 사찰문화연구원출판국, 1994.
  • 이병희, 「조선전기 원각사의 조영과 운영」, 『문화사학』제34호, 한국문화사학회, 2010.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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