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원전(含元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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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교태전 서쪽의 침전.

개설

함원전(含元殿)은 흠경각(欽敬閣)과 같은 공간에 있으며, 세종이 함원전은 내전으로 지은 것이며 흠경각은 천문 관측기구를 설치하기 위하여 천추전(千秋殿)의 서쪽에 지은 것이었다. 흠경각과 함원전 사이에는 소침(小寢)(『명종실록』 22년 6월 28일)으로 양심당(養心堂)이 있었다(『명종실록』 22년 6월 28일).

위치 및 용도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교태전(交泰殿) 내행각 바깥쪽에 남북으로 함원전과 흠경각을 나란히 배치하였다(『고종실록』 4년 8월 18일). 양심당은 중건하지 않았으며 함원전과 흠경각의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행각을 두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되었다. 서행각의 대재문(大哉門)을 통하여 경회루(慶會樓) 쪽으로 나갈 수 있고, 교태전 서행각의 재성문(財成門)은 교태전 내정(內庭)으로 통한다.

함원전은 교태전의 서쪽에서 인지당(麟祉堂)과 대칭을 이루는 전각으로 세종대에 세운 것이다(『세종실록』 31년 6월 18일). 세조는 함원전에 불상을 봉안하여 내불당으로 만들고(『세조실록』 9년 4월 7일) 불교 행사를 자주 열었다. 고종대에는 유생을 시험하거나 축문을 살펴보는 등 왕이 업무를 보는 데 사용하였다. 함원전 옆의 양심당은 조선전기에 있었던 전각으로 강녕전 서북쪽에 있던 침전이다. 주로 세조대에 신하들을 인견하거나 경서를 강론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연산군대에 신구(新舊) 일영도(日影圖)를 설치하였으며(『연산군일기』 10년 11월 9일) 명종이 양심당에서 승하했다(『명종실록』 22년 6월 28일).

함원전과 같은 공간의 흠경각은 1438년(세종 20) 1월에 세웠으며 그 안에 시각과 방위, 계절을 살피던 장치를 설치했다. 흠경(欽敬)은 『서경』「요전(堯典)」편에 ‘공경함을 하늘과 같이 하여, 백성에게 절후를 알려 준다[欽若昊天,敬授人時].’는 데에서 따온 것이다.

변천 및 현황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함원전은 1865년(고종 2) 11월에 상량하였다. 1876년(고종 13) 화재로 소실된 후에 1888년(고종 25) 같은 형태와 규모로 재건되었다. 양심당은 1464년(세조 10)부터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보인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며 고종대에 중건하지 않았다. 1553년(명종 8)의 화재로 흠경각과 그 안에 있었던 장치들이 모두 소실되었다. 함원전은 고종대에 강녕전(康寧殿) 서북편에 위치하였으며, 고종초에 중건할 때에는 툇간을 포함하여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20칸이었으나 1876년(고종 13) 화재로 소실된 후에 1888년 함원전과 같은 24칸의 평면으로 재건되었다. 함원전과 흠경각은 1917년 철거되어 창덕궁의 전각을 짓는 데 이용되었다(『순종실록』 10년 11월 27일).

형태

고종대에 중건한 함원전과 흠경각은 평면 구성이 같으나 흠경각 툇간의 크기가 조금 더 크게 지어졌다. 중앙에 대청 2칸과 좌우 방 1칸씩을 두고 4면에 툇간을 두른 평면 구성이며 측면의 툇간은 마루가 아닌 방으로 구성하였고 함원전은 교태전 서행각으로 복도가 연결되어 있다. 공포는 물익공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함원전은 다른 전각보다 높은 위상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데, 중종은 경회루와 근정전(勤政殿)처럼 함원전의 지붕도 청기와로 올리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궁궐지(宮闕志)』
  • 『궁궐지(宮闕誌)』「북궐도형(北闕圖形)」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