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역(황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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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황해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금교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황해도 황주군 천주면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고려전기 전국의 525개 역을 22개 역도(驛道)로 편성하면서 역제(驛制)가 정비되었다. 그러나 이때에 경천역(敬天驛)은 확인되지 않고,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후 세조 연간에 역제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할 때, 금교도(金郊道)를 구성하는 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황해도 황주목에 위치해 있었으며,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경천역은 조선 초기에는 찰방의 관할로 편제되었다. 이후 태종 초에 역승(驛丞), 관승(館丞) 체제로 바뀌었다가, 1415년(태종 5) 풍해도 9참과 함께 금교경천도관승(金郊敬天道館丞)의 관할이 되었다. 조선초에 전국적인 역도-속역 체계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금교역(金郊驛)·흥의역(興義驛)·금암역(金巖驛)·보산역(寶仙驛)·안성역(安城驛)·용천역(龍泉驛)·검수역(劒水驛)·절령역(岊嶺驛)·동선역(洞仙驛) 등과 함께 참로찰방(站路察訪) 소속이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경천참(敬天站)으로 기재돼 있다.

조선초에 명(明)과 조선을 오가는 사신들의 이동 경로로 험난한 자비령로(慈悲嶺路) 대신 평탄한 극성로(棘城路)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는데, 이 결과 1456년(세조 2) 자비령로에 있던 절령역, 동선역, 경천역 등 세 역을 극성로로 옮길 것을 결정하였다. 이듬해인 1457년 세 역의 이설(移設) 위치를 확정하였으며, 인마(人馬)가 번성해지기를 기다려 옮기게 하였다(『세조실록』 3년 4월 24일).

조직 및 역할

『여지도서(輿地圖書)』 황주목 조에 따르면, 경천역에는 역노(驛奴) 31명과 역마(驛馬) 24필이 배속되어 있었으며, 역리(驛吏)는 없었다. 금교도(金郊道)의 속역이었다.

변천

조선시대의 역참 제도가 정비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 금교도에 소속되었으며,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금교도의 속역으로 존속하였다.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황주목 조에 따르면, 경천역은 고을에서 남쪽으로 6리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는 황해도 황주군 천주면 경천리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조선전기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오일순, 「고려시대 역제의 변동과 잡색역」,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 정요근, 「고려전기 역제의 정비와 22역도」, 『한국사론』45, 2001.
  • 정요근, 「조선초기 역로망의 전국적 재편-교통로의 측면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46집, 2008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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