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일전(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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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개경에 있던 태종의 잠저(潛邸)를 증수하여 조성한 경덕궁의 정전(正殿).

② 세조가 창덕궁 후원에 지은 전각.

개설

무일전은 두 개가 있는데, 태종에 의해 개성에 조성한 것과 세조가 창덕궁 후원에 조성한 것이 있다. 두 건물은 성격에도 차이가 있다.

먼저 태종대의 무일전은 개성에 있었다. 경덕궁(敬德宮)은 개성 남쪽에 있던 궁궐로써 정전이 무일전이었다(『태종실록』 1년 윤3월 11일).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지금은 흔적만 일부 남았다. 1693년(숙종 19) 숙종이 개성을 방문하여 손수 글을 지어 비석을 만들게 하고 비각을 세워 경덕궁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숙종실록』 19년 8월 30일).

두 번째 무일전은 세조대 영건한 것이다. 1468년(세조 14) 8월 세조는 왕위를 물려준 후에 휴양을 하고자 창덕궁 후원에 새로운 전각을 짓게 하였다(『세조실록』 14년 8월 14일). 이때 조성한 전각의 이름을 무일전이라 하며, 김개(金漑)·김국광(金國光)·노사신(盧思愼)·이극증(李克增)에게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위치 및 용도

개경 남쪽 용수산에 위치한 태종의 잠저였던 경덕궁의 정전을 무일전이라 한다. 1468년 세조가 휴양을 목적으로 창덕궁 후원에 지은 전각 이름도 무일전이다.

변천 및 현황

개경에 먼저 조성된 무일전은, 1401년(태종 1) 윤3월에 개경에 있던 경덕궁의 정전을 좁다는 이유로 고쳐 지은 것이다. 전각의 명칭은 하륜(河崙)·권근(權近)에게 명하여 짓게 하여, ‘무일전’이라고 하였다. 경덕궁은 개경의 추동(楸洞)에 위치한 궁궐로 태종이 왕이 되기 전에 거처하던 곳이다. 태조는 조선을 개국하고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나, 정종은 1399년(정종 1) 개경으로 환도하고 이곳에서 지냈다. 고려의 본궁은 불에 탔기 때문에 마땅히 궁궐을 삼을 곳이 없어 태종의 잠저를 궁으로 삼고 2년여 간 산 것이다.

그 뒤를 이은 태종 또한 1405년(태종 5)까지 이곳을 궁으로 사용하면서 여러 전각을 지었다. 1401년(태종 1) 7월에 궁정(宮庭)이 낮고 좁아서 조회 받기 마땅치 않다 하여 총제(摠制)신극례(辛克禮)와 승추부(承樞府) 경력(經歷)박순(朴淳)을 명하여, 본궁(本宮)과 무일전을 헐고 고쳐 짓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년 7월 23일). 이때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민제(閔霽)가 왕흥(王興)의 집을 사서 바쳤으며 그 인근의 인가(人家)를 왕이 사들여 궁역을 넓혔다.

관련 사건 및 일화

태종은 무일전에서 명나라의 황제가 보내온 고명(誥命)을 받아 조선의 국왕으로 인정받았다. 또 무일전에서는 명나라의 칙서를 받거나, 사신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선의문(宣義門)으로 나아가 맞이하고, 궁궐에 들면 무일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그 외에도 조하를 행하고, 왕의 생일을 축하하고 삼공신(三功臣)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지기도 하였다. 1401년 4월에 태종이 친히 초시(初試)에서 합격한 이들을 다시 시험을 보는 복시(覆試)를 거행하여 조말생(趙末生)과 이적(李迹), 윤회(尹淮)가 합격하였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김동욱 외, 『북한문화유산관련자료집 1 -개성역사지구』, 사단법인 ICOMOS한국위원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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