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成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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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6년(선조19)∼1680년(숙종6) = 95세]. 조선 중기 인조∼숙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자교(子喬), 호는 매변(梅邊) · 정옹(鼎翁)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주거지는 경기도 파주(坡州) 우계(牛溪)다. 아버지는 현감성문준(成文濬)이고, 어머니 함안조씨(咸安趙氏)는 주부(主簿)조감(趙堪)의 딸이다. 대유학자 우계(牛溪)성혼(成渾))의 손자이므로, 서인(西人) 정권에서 우대를 받아 95세까지 현임에 있었다.

선조∼인조 시대 장년기 활동

어려서부터 파주의 우계서당(牛溪書堂)에서 시(詩)와 문장을 배워서 모두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선조 후반기 할아버지 성혼(成渾)이 서인(西人) 정철(鄭澈)의 배후로 지목되어 동인(東人)들의 무함(誣陷)을 받아서 삭탈관직 당하자, 마침내 벼슬할 뜻이 없어서 과거(科擧)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음보(蔭補)로 1630년(인조8) 사산감역(四山監役)에 임명되어 여러 관직으로 옮기며 내자시(內資寺)주부(主簿)로 승진되었다. 1633년(인조11) 봉화현감(奉化縣監)으로 나갔는데,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고을의 병사를 거느리고 앞장서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청(淸)나라 군사와 싸웠다. 그 뒤에 안기찰방(安奇察訪)에 임명되었는데 모친상을 당하였다. 복제(服制)를 끝마치자, 지평현감(砥平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46년(인조24) 세자익위사 사어(司禦)에 임명되었다가, 익위(翊衛)로 승진하였고, 1649년(인조27) 외직으로 나가서 양근군수(楊根郡守)가 되었다.

효종∼현종 시대 노년기 활동

1652년(효종3) 나이 67세 때 안산군수(安山郡守)에 임명되었는데, 마침 큰 송사(訟事)가 제기되었다. 당시 피고가 감사(監司)의 비호를 받았으나 내용이 정당치 못하였으므로, 그가 권력의 개입을 미워하여 피고를 패소(敗訴)시켜버리자 그 감사가 결국 그를 파직시켰다. 그러나 곧 다시 서용(敍用)되어, 세자익위사 익위에 임명되었다. 1662년(현종3) 사직서(社稷署) 영(令)에 임명되었고, 1664년(현종5) 선공감(繕工監)첨정(僉正)으로 옮겼다. 1665년(현종6) 선공감 첨정으로 재임할 때 나이가 80세나 되었으므로, 노인을 우대하여 현종이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올리고, 연이어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돈녕부(敦寧府)도정(都正)에 임명하였다. 1671년(현종12) 나이 86세에 노인을 우대하는 특전으로 현종이 종3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올리고, 이어서 돈녕부 동지사에 임명하였다.

1675년(숙종1) 나이가 90세였으나 기력이 더욱 강녕하였으므로, 경연(經筵)의 신하가 계청(啓請)하여, 숙종이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로 올리고, 중추부 지사에 임명하였다. 1676년(숙종2) 남인들이 집권하자, 서울에 남아있을 마음이 없어서 마침내 여러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품계도 높고 나이도 많으니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마치려고 한다.” 하고 결연히 서울을 떠나 파주의 옛 집으로 돌아갔다. 1678년(숙종4) 나이가 93세에 이르자, 숙종이 은전을 베풀어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로 올렸고, 조금 지나서 경연의 신하가 계청하여 숙종이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로 올렸다. 1680년(숙종6) 중추부 지사에 임명하였는데, 그가 상소하여 사임하였으나, 숙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1680년 12월 23일 파주우계의 옛 집에서 죽으니, 향수가 95세였다.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

성품과 일화

성직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온화하고 중후(重厚)하여 입이 무겁고 행동은 근신하였다. 그는 사람을 한결같이 성심(誠心)으로 대하였으나, 남의 잘못을 발견하면 곧 대의(大義)를 가지고 꾸짖었다. 관직에 나아가서 남과 경쟁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으며, 자기의 소임을 다하면서 인정을 베풀고 남을 이해하려고 힘썼다. 백성들을 항상 아픈 환자처럼 대하면서, 자신의 건강도 항상 아픈 사람처럼 보살펴 95세까지 살아서 조선시대 최장수한 1품 대신이 되었다. 조선시대 최장수한 정승은 이귀령(李貴齡)이 94세까지, 다음으로 황희(黃喜)가 90세까지 살았는데, 각자 자기의 건강 비법을 가지고 있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 북쪽 녹문리(鹿門里)의 언덕에 있고, 둘째 부인과 합장하였는데,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남계집(南溪集)』 권72 「지중추부사 시정혜 성공 신도비명(知中樞府事諡靖惠成公神道碑銘)」) 첫째 부인 청풍김씨(淸風金氏)는 김비(金棐)의 딸이고, 둘째부인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는 남궁행(南宮荇)의 딸인데, 자녀는 4남 3녀를 두었다. 장자 성희적(成熙績)은 사의(司議)를 지냈고, 차자 성희주(成熙冑)는 군수(郡守)를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남계집(南溪集)』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 『명재유고(明齋遺稿)』
  • 『사계전서(沙溪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