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갑조(宋甲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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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4년(선조7)~1628년(인조6) = 55세] 조선 중기 인조 때 활동했던 문신. 자는 원유(元裕), 호는 수옹(睡翁)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인데, 주거지는 충청도 회덕(懷德) 송촌(宋村)이다. 아버지는 의빈부(儀賓府)도사(都事)송응기(宋應期)이고, 어머니 광주이씨(廣州李氏)는 판서이윤경(李潤慶)의 딸이며 영의정이준경(李浚慶)의 조카이다. 봉사(奉事)송귀수(宋龜壽)의 손자이고, 송시열(宋時烈)의 아버지이다. 간이(簡易)최립(崔岦)의 문인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7년(광해군9) 사마시(司馬試)에서 생원 · 진사 양시(兩試)에 모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44세였다. 그때 같이 합격한 이영구(李榮久) 등이 광해군을 지지하여 서궁(西宮)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많은 유생(儒生)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혼자 서궁(西宮)에 숙배(肅拜)하였으므로, 유생(儒生)들이 유적(儒籍)에서 그를 삭제하여버렸다. 그 길로 즉시 고향 옥천(沃川)으로 돌아가서 독서로 소일하면서 후진(後進)을 가르쳤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에 강릉참봉(康陵參奉)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반란> 때는 도보로 걸어서 공주(公州)의 행재소(行在所)까지 인조를 호종하였다. 반란이 평정된 뒤 경기전(慶基殿)참봉(參奉)이 되었고, 1627년(인조5) 사옹원(司饔院)봉사(奉事)에 임명되었는데, 서울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에 후금(後金)의 침입으로 남하하는 소현세자(昭顯世子) 일행을 만나서 전주(全州)까지 호종하였다. 뒤이어 조정에서 후금과 ‘형제의 나라’가 되어 화의(和議)하였다는 말을 듣고, 비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성품과 일화

송방조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있었다. 평생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는데, 요란스럽고 번화한 음악과 기녀(妓女)의 자리에서도 적료(寂廖)한 태도가 마치 고목(槁木)과 같았다.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추향(趍向)이 올발랐다. 항상 정암(靜庵)조광조(趙光祖)와 율곡(栗谷)이이(李珥) 두 선생을 추앙하며 스승으로 삼았다. 손수 『기묘사적(己卯事蹟)』과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의 글을 초하여 여러 자제들에게 가르치고 행실을 권장하였다. 아름다운 행실이 있는 자를 보면 비록 미천하고 어린 아이라도 대접하기를 존귀한 사람처럼 하고, 착하지 못한 것을 보면 안색이나 언사에 있어서 조금도 가차가 없었다. 시속 사람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서로 내왕하는 사람은 두셋 집의 일가와 몇 명의 친구에 지나지 않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회덕(懷德) 동남쪽 이산현(利山縣) 금당곡(金堂谷)에 있는데, 그의 절친한 친구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선산곽씨(善山郭氏)는 곽자방(郭自防)의 딸로, 자녀는 5남 2녀를 두었다. 차남 송시묵(宋時黙)은 군수를 지냈고, 3남 송시열(宋時烈)은 노론(老論)의 영수로서 영의정을 지냈으며 5남 송시걸(宋時杰)은 목사를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사계전서(沙溪全書)』
  • 『한수재집(寒水齎集)』
  • 『간이집(簡易集)』
  • 『동계집(桐溪集)』
  • 『청음집(淸陰集)』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동춘당집(同春堂集)』
  • 『석재고(碩齋稿)』
  • 『설정집(雪汀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