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자방(郭自防)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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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곽자방 |
한글표제 | 곽자방 |
한자표제 | 郭自防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무신, 사회운동가/의병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 |
집필자 | 이현숙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사망 | 1592년(선조25) |
본관 | 현풍(玄風) |
주거지 | 충청도 옥천(沃川) |
묘소소재지 |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塚): (현)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
증조부 | 곽은(郭垠) |
조부 | 곽지정(郭之楨) |
부 | 곽언(郭諺) |
모_외조 | 나주박씨(羅州朴氏) |
처_장인 | 정씨(鄭氏): 정원로(鄭元老)의 딸→(자녀)1남 3녀 |
자녀 | (1자)곽건(郭鍵) (1녀)송갑조(宋甲祚)의 처: 송시열(宋時烈)의 어머니 (2녀)김신효(金愼孝)의 처 (3녀)이덕렴(李德濂)의 처 |
유명자손 | 곽문구(郭文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곽자방(郭自防) |
총론
[?~1592년(선조25)].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 활동한 무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금산(錦山)의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塚)’에 묻힌 의병(義兵). 충청도 의병장(義兵將) 조헌(趙憲)의 편장(編將). 본관은 현풍(玄風)인데, 통정대부(通政大夫)곽언(郭諺)의 아들이고, 송시열(宋時烈)의 외조부이다.
임진왜란 때 충청도 의병 활동
스물 안팎의 나이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練院)봉사(奉事)가 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날 때 마침 근친(覲親)하러 충청도 옥천(沃川)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때 중봉(重峯)조헌이 충청도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그도 달려가서 의병에 응모하자, 조헌이 기뻐하며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그대가 왔으니, 이제야 우리들의 일을 성취할 수 있게 됐다.” 하였다. 조헌은 곽자방을 편장으로 삼아서 항상 측근에 두었다.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조헌과 사이가 나빠서, 의병이 관군(官軍)에 이롭지 않다고 핑계하고, 옥천에 이문(移文)하여 곽자방의 아버지 첨지(僉知) 곽언(郭諺)을 감옥에 가두고 아들이 조헌의 의병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압박하였다. 그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간 아들 곽자방에게 아버지 곽언은 꾸짖기를, “군부(君父)가 어떤 처지에 계신데, 빨리 돌아가서 중봉 선생과 사생(死生)을 함께 하도록 하라.” 하였다. 곽자방은 급히 조헌의 막하로 돌아와서 의병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다.
순찰사(巡察使)와 수령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의병장 조헌은 곽자방과 문하생을 중심으로 군사와 군량을 모집하고 전쟁 기계를 만들어 7월 4일에 공주(公州)에서 의병을 결집하니, 모두 1천 7백여 명이었다. 이때 왜적이 청주(淸州)를 점령하자, 조헌의 의병은 청주로 진군하여, 8월 1일 바로 청주성(淸州城)의 서문 밖에서 승장(僧將) 영규(靈圭)가 이끄는 의승(義僧: 의병 승병)과 진(陣)을 합치니, 모두 3천 8백여 명이었다. 조헌의 충청도 의병이 청주성을 공격하였는데, 편장 곽자방은 조헌을 도와서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종일토록 독전(督戰)하니, 왜적이 크게 패하여 마침내 전사자의 송장을 태우고 밤중에 달아났다. 이로 말미암아 충청좌도(忠淸左道) 여러 둔(屯)의 왜적들이 모두 도망하였다.
칠백의사총
조헌은 앞서 고경명(高敬命)이 전라도(全羅道)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가 실패한 금산성(錦山城)의 왜적을 공격하려고 하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권율(權慄)과 충청도관찰사허욱(許頊)이 만류하면서 동시에 군사를 일으켜 치자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기일이 연기되자, 조헌은 분개하여 혼자 의병 7백여 명을 이끌고 재를 넘으려고 하였다. 중 영규가 간곡히 만류하니, 조헌은 울면서 말하기를 “목숨을 버려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어찌 성패 따위를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북을 치면서 행군하였다. 이때 곽자방은 조헌을 옆에서 도왔는데, 중 영규도 “조공(趙公)을 혼자 죽게 할 수는 없다.” 하고, 승려 수백 명을 거느리고 진(陣)에 합류하여 함께 진군하면서, 관군에게 지원병을 재촉하였다. 왜적이 후속 지원부대가 없는 것을 알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성을 나와서 싸웠다. 조헌이 “오늘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니, 편장 곽자방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모두 힘을 다하여 싸웠다. 왜적이 세 번 진격했다가 세 번 패배하였다. 그러나 조헌의 군사는 이미 화살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좌우에서 빠져나가기를 청하자, 조헌이 “대장부가 죽었으면 죽었지, 구차스럽게 살 수는 없다.” 하고, 북을 울리며 더욱 급하게 전투를 독려하였다. 편장 곽자방은 군사들과 함께 맨 주먹으로 왜적과 육박전을 벌였는데, 한 사람도 자리를 떠나는 자가 없이 모두 조헌과 함께 전사하였으며, 중 영규도 승병(僧兵)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튿날 조헌의 동생 조범(趙範)이 몰래 전쟁터에 들어가서 시체를 거두었는데, 조헌은 깃발 아래에서 죽었고 편장 곽자방을 비롯한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그 곁에 빙둘러 죽어 있었다. 왜적이 퇴각한 뒤에 조헌의 제자들이 가서 7백 명의 시체를 거두어 큰 무덤 하나를 만들고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塚)’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
곽자방은 조헌의 막하(幕下) 참모(參謀)들 중에서 전공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에 월정(月汀)윤근수(尹根壽)가 지은 금산비(錦山碑)에 특별히 그의 관직과 성명을 따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조정에서 그의 집을 복호(復戶)하고 그 마을에 정려(旌閭)를 세웠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난중잡록(亂中雜錄)』
- 『송자대전(宋子大典)』
- 『금산비문(錦山碑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