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백의사총(七百義士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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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제2차 금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700여 명의 의병이 묻힌 묘역.

개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함락한 금산성(錦山城)을 공격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한 조헌(趙憲)과 영규(靈圭)를 비롯한 의사(義士) 700여 명이 묻힌 묘역이다.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다.

역사적 배경

1592년(선조 25) 6월 하순부터 일본군은 전라도 공략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이 지휘하는 일본군 제7군은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충청도 금산을 6월 23일에 점령하여 전라도 진공 작전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일본군은 7월 초에 충청도의 웅치(熊峙)와 이치(梨峙) 전투에서 전라도 진공을 시도하였으나, 관군과 의병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하였고 제7군의 주력은 금산성으로 철군하였다. 7월 9일 금산성을 수비하는 일본군 부대를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이끄는 의병과 전라도방어사곽영(郭嶸)이 지휘하는 관군이 연합하여 공격하였으나, 다음 날 오히려 적의 반격을 받아 고경명을 비롯한 의병 다수가 전사하고 관군은 도주하였다. 이후 금산성에 주둔한 일본군은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주변의 조선 관군과 의병을 견제하였다.

발단

1592년(선조 25) 5월 초 충청도 옥천에서 봉기한 전 보은현감 조헌은 3,100여 명의 의병·승병·관군 연합군을 이끌고 청주성을 공략하여 8월 2일 탈환에 성공하였다. 이후 금산성 공략을 위해 공주로 회군한 조헌의 의병 부대는 충청도순찰사윤국형(尹國馨)의 시기와 방해로 흩어지게 되어 700여 명만이 남게 되었다. 전라도관찰사권율(權慄)과 공주목사허욱(許頊)이 약속된 협공 기일을 지키지 못하자, 조헌은 승장(僧長) 영규와 부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관군의 출전을 재차 독려하며 단독으로 금산성을 향해 진군하였다. 권율은 출전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공격을 연기하자는 답서를 보냈지만, 이 서찰은 8월 17일 금산성 밖 10리 지점에 도착한 조헌의 진중(陣中)에 전달되지 못했다. 영규의 승병과 합류한 조헌의 의병은 8월 18일 아침을 기해 적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금산성을 나온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았다. 공성군의 병력이 의외로 미약한 것을 파악한 일본군은 이미 전날 밤 조헌 부대의 배후도 차단한 상태였다. 양면에서 협공을 받아 포위 상태에 빠진 조헌 부대는 죽음을 각오하고 종일 혈전을 벌였으나 끝내 패배하여 조헌과 영규를 비롯한 7백여 명이 전사하였다. 승리한 일본군도 무수한 사상자를 낸 후, 소극적인 수성에만 몰두하다가 9월 중순경 전라도에서 퇴각하기에 이른다. 전투가 끝난 다음 날 조헌의 동생 조범(趙範)이 전장에 잠입하여 조헌의 시체를 수습하였고, 4일 후인 22일에는 조헌의 제자 박정량(朴廷亮)과 전승업(全承業) 등이 전사자의 시신을 거두어 합장한 뒤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塚)’이라고 표기하였다.

경과

1603년(선조 36) 3월 충청도와 전라도의 유생이 함께 이곳에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憲先生一軍殉義碑)를 세웠다. 1634년(인조 12)에는 순의단(殉義壇)을 설치하여 해마다 제향을 올렸다. 1647년(인조 25)에는 사당을 건립하여 칠백의사의 위패를 모셨고, 1663년(현종 4)에는 이 사당에 ‘종용사(從容祠)’라는 사액(賜額)이 하사되었다. 1963년 국가에서 이곳을 사적 제105호로 지정하였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중봉집(重峰集)』
  • 서인한, 『壬辰倭亂史』,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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