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극성(姜克誠)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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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강극성 |
한글표제 | 강극성 |
한자표제 | 姜克誠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명종~선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백실(伯實) |
호 | 취죽(醉竹), 보만당(保晩堂)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26년(중종21) |
사망 | 1576년(선조9)「비문」, 1577년(선조10)『방목』 |
본관 | 진주(晉州)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강학손(姜鶴孫) |
조부 | 강태수(姜台壽) |
부 | 강복(姜復) |
모_외조 | 의성김씨(義城金氏): 김안국(金安國)의 딸 |
처_장인 | 창녕성씨(昌寧成氏): 성근(成謹)의 딸 →(자녀)3남 3녀 |
자녀 | (1자)강선경(姜先慶) (2자)강종경(姜宗慶) (3자)강세경(姜世慶) (1녀)이정필(李廷弼)의 처 (2녀)이용택(李用擇)의 처 (3녀)권제(權霽)의 처 |
유명자손 | 강진창(姜晉昌), 강진휘(姜晉暉), 강진승(姜晉昇), 강진명(姜晉㫥)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강극성(姜克誠) |
총론
[1526년(중종21)~1576년(선조9) = 51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백실(伯實), 호는 보만당(保晩堂)이다. 음력 5월 13일 죽취일(竹醉日)에 태어났다고 하여 호를 취죽(醉竹)이라고도 하였다. 본관은 진주(晉州)인데, 우의정(右議政)강귀손(姜龜孫)의 증손자이다. 모재(慕齋)김안국(金安國)의 외손자이고, 윤춘년(尹春年)의 문인(門人)이다.
명종 시대 활동
1546년(명종1)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8) 문과(文科)에 급제한 다음, 3년 뒤에 중시(重試)에 선발되어 문명(文名)을 떨쳤다.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정자(正字)에서 차례로 수찬(修撰), 교리(校理)에 올랐다. 1555년(명종10)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혔는데,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 이량(李樑) 등과 함께 책을 읽으면서 서로 깊이 사귀었다. 그는 이량의 천거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1556년 홍문관응교(應敎)가 되었다가, 1562년(명종17)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에 임명되고 이어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으로 옮겼다. 또 1563년(명종18) 의정부(議政府)검상(檢詳)에 임명되어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군기감(軍器監)정(正)이 되었으나, 이량 일파로 몰려서 쫓겨났다.
명종 후기 외척과 사림파의 싸움
명종이 즉위한 뒤에 모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8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 사이 명종의 외숙 윤원형(尹元衡)이 왕권을 침해하는 일이 많았다. 명종이 친정(親政)하게 되자, 명종은 일부러 왕비 인순왕후의 외숙 이량을 내세워 윤원형의 소윤(小尹) 일파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명종 후기로 가면서, 이량 일파가 점차 득세하여, 윤원형의 소윤 일파를 몰아내고 마침내 사림파(士林派)와도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량은 효녕대군(孝寧大君) 5대손이고, 국구(國舅) 심강(沈鋼)의 처남이었다. 심강의 아들 심의겸(沈義謙)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림파의 선비들과 가깝게 교유하였는데, 1563년(명종18) 이량 일파가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자, 이에 분노하였다. 1565년(명종20) 심의겸은 아버지 심강을 내세워 인순왕후를 통하여 명종의 허락을 받은 후, 옥당(玉堂)의 신료들을 이끌고 외삼촌 이량을 탄핵하여 유배시켰다. 이어 그 일파를 모조리 관계에서 추방하였는데, 강극성도 삭직(削職)되어 문외송출(門外送黜)되었다. 그 뒤에 심의겸은 1575년(선조8) 신진 사류 김효원(金孝元)과 이조(吏曹)정랑(正郞)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사림파 전체를 동서(東西) 분당(分黨)으로 나뉘게 한 장본인이 되었다.
관직에서 추방당한 강극성은 십여 년 동안 강호(江湖)를 유랑하면서 시가(詩歌)를 읊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는데, 몇 편의 글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1567년에 즉위한 선조는 1574년(선조7)에 가서야 강극성에게 직첩(職牒)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특별히 그를 불러서 제용감(濟用監)정(正)으로 임명하였다가, 외직인 장단도호부사(長湍都護府使)로 내보냈다. 강극성은 1576년(선조9)에 갑자기 죽었는데, 향년 51세였다.
일화와 사평
어려서 아버지를 잃자, 외조부 좌찬성김안국이 데려다가 길렀는데, 영리하고 재능이 있어서 글을 가르치면 하루에 수천 개의 글자를 외워서 신동(神童)이라고 일컬어졌다.
30세 무렵 왕후의 외삼촌 이량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할 때 명종이 글을 읽는 선비들에게 선온(宣醞: 궁중 술)을 하사하고 당일로 시(詩)를 지어 올리라고 하였다. 모두 주춤하고 있는데, 그는 취기(醉氣)를 띤 채 즉석에서 시를 지어 올리니, 명종이 그 시에 감탄하여 양마(良馬) 1필을 내려주었다. 당시 그가 지은 시는 여러 사람에게 널리 전파되어 모두 애송(愛誦)할 만큼 유명하였다.
허목(許穆)이 지은 묘표(墓表)에서, “그는 시재(詩才)가 뛰어나 장래가 촉망되었는데, 외척의 세력 다툼에 휘말려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불우하게 생애를 마쳤다.”고 하였다. 그의 생애는, 당시 이량 일파라 하여 함께 쫓겨났던 고경명(高敬命)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義兵) 대장으로 그 아들과 전사하여 공훈을 세워서 그 명예를 회복하였던 것과 대조된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미암집(眉巖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동포휘언(東圃彙言)』
- 『석담일기(石潭日記)』
- 『계곡집(谿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