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일(具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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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0년(광해군12)~1695년(숙종21) = 76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숙종(肅宗) 때 활동한 무신(武臣). 자는 중경(重卿)이고, 본관은 능성(綾城)이며 가계는 구사맹(具思孟)-구굉(具宏)-구인기(具仁墍)-구일로 이어지는데, 할아버지 구굉은 인조의 외삼촌으로서 인조반정(仁祖反正)의 1등 공신이고, 아버지 구인기는 인조의 외사촌 동생이다.

인조~현종 시대 활동

1642년(인조2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46년(인조24) 공신(功臣)의 적장자(嫡長子)라고 하여 와서(瓦署)별제(別提)에 임명되었다가, 공조좌랑으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부친 구인기가 오랫동안 외직에 있었기 때문에 항상 부친을 따라다니면서 시봉(侍奉)하느라 내직에 있을 수가 없었다. 1656년(효종7)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를 거쳐서 횡성현감(橫城縣監) 등에 임명되었다.

1664년(현종5) 남평현감(南平縣監)을 거쳐, 1667년 사재감(司宰監)첨정(僉正)·선공감(繕工監)첨정으로 승진하였다. 1668년 현종(顯宗)이 금원(禁苑)에서 사후(射侯)를 관람하였는데, 그가 내승(內乘)으로서 입시(入侍)하여 활을 쏘아 번번이 명중시켜 시사(試射)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이에 현종이 즉시 호위군관(扈衛軍官)에 소속시키고 곧바로 전시(殿試)에 나가게 하였는데, 일찍이 23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이때 49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에 나아가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그 뒤 도총부(都摠府)경력(經歷)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훈련원(訓鍊院)부정(副正)으로 옮겼다. 1669년 홍양영장(洪陽營將)·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가, 1670년(현종11) 장단부사(長湍府使)·황해도병마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를 거쳐서, 1672년 경기도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다.

숙종 시대 활동

1675년(숙종1)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특별히 임명되었다가, 또 총관(摠管)을 겸하여 포도대장(捕盜大將)으로 승진하였다. 1676년 부친상을 당해서 3년 동안 여막(廬幕)살이를 하였다. 상복을 벗자 능평군(綾平君)에 봉해졌고, 다시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어 포도대장을 겸임하였다. 1679년(숙종5) 봄에 영의정(領議政)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아버지의 세력을 믿고 양가집의 부녀자를 간음하였는데, 포도대장구일이 그 죄상을 조사해서 다스리려고 하였다. 요로에서 권력자들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회유하고 협박하였으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끝내 허견의 옥사(獄事)를 성립시켰다. 이에 허목(許穆)의 당인(黨人: 남인)들이 그를 모함하여, 경상도 김해(金海)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1680년(숙종6) 허적이 사사(賜死)당하고 남인(南人)들이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는 다시 포도대장에 복직하였다가 특별히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고 1682년 총융사(摠戎使)가 되었다. 1686년(숙종12) 숙종(肅宗)이 춘당대(春塘臺)에서 문무의 여러 신하들에게 사후(射侯)하도록 명하였는데, 그때 67세의 구일(具鎰)이 화살 4발을 과녁에 맞혔다. 임금이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시키고 비변사(備邊司)의 일을 겸임하게 하였다.

1688년(숙종14)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승하하던 날 외손녀(外孫女)의 혼사(婚事)를 집에서 치렀다고 하여 관작을 삭탈당하고 도성문 밖으로 출송(黜送)되었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몰려나고 남인이 집권할 때, 대관(臺官)에서 그를 절도(絶島)에 유배시키자고 하였으나, 숙종이 관직만 삭탈하고 송추(松楸)로 추방하였다. 1694년(숙종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다시 돈령부(敦寧府)지사(知事), 훈련원(訓鍊院)지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노환(老患)으로 사직하였다. 1695년(숙종21) 11월 노환으로 송추의 옛 집에서 죽으니, 향년 76세였다.

성품과 일화

구일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 「실록 졸기(卒記)」에서는 “별다른 재능이 없는데도 훈척의 자제로 지위가 숭반에 올랐다.”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기도 한다. 그는 장신(長身) 거구(巨軀)에 남을 위압하는 기상을 타고났으나, 항상 너그럽고 후덕하게 세상 사람들을 포용하였다. 시속(時俗)을 따라 세상의 사람들에게 굴복 당하지도 않았다. 중앙과 지방의 군사 요직을 맡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한성부판윤을 지낸 것만도 두 번이었는데, 모두 군민(軍民)들의 환심(歡心)을 얻었다. 간혹 그를 시기하는 권귀(權貴)들에게 비난을 받고 험난한 길을 걷기도 하였으나, 끝내 자신의 신념을 온전히 지켜 좋은 명예를 지니고 세상을 떠났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군장리(群場里)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박세당(朴世堂)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백호전서(白湖全書)』
  • 『연도기행(燕途紀行)』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