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병실기(鍊兵實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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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 조선에 전해져 대기병 전술에 주요하게 참고된 명나라 척계광이 편찬한 병서.

개설

『연병실기』는 명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이 편찬한 병서로서 중국 북방 몽골족의 기병 전술에 대응하기 위해 전차와 기병, 보병 등을 활용한 전술을 담고 있다. 임진왜란 중 조선에 원병으로 참전한 명나라 군에 의해 조선에 전해져 이후 조선에서 크게 활용되었다. 『연병실기』는 1593년 『기효신서』가 조선에 입수된 이후 여러 중국 병서와 함께 입수되었고 17세기 초 북방 여진족의 위협이 증가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한 전술 체계를 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조선에서는 『연병실기』를 바탕으로 한교(韓嶠)가 『연병지남(練兵指南)』을 편찬하였는데, 이는 『기효신서』에 바탕을 둔 기존의 병서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었다. 특히 여러 전술 중에 대기병(對騎兵) 전술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편찬/발간 경위

척계광은 복건성과 절강성의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운 후 대학사 장거정과 북직예총독(北直隸總督) 담륜의 천거로 명나라 북방의 계주(薊州) 방어를 담당하는 총리계주창평요동보정련병사무(總理薊州昌平遼東保定練兵事務)라는 직책을 맡게 되면서 그의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이 직책은 북직예의 주진(主鎭)인 계주와 그 주변 지역의 군사를 통괄하는 것으로, 그 이전 주로 왜구를 상대로 전투를 하던 그가 이제는 북방족과의 전투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후 15년 동안 재직하면서 타안부(朶顔部) 등의 북방족과의 전투에서 그들의 수령을 포로로 잡는 등 큰 공을 세우게 된다. 특히 1579년 11월에는 토밀부(土蜜部)의 침입을 격퇴하여 소보(少保)로 승진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북방의 기마병에 대항하기 위해 독특한 전술을 시도하게 된다. 그의 전술에서 중요시된 것은 전차(戰車)였다. 이 전차는 양 측면에 여덟 폭으로 되어 있는 병풍 같은 나무 방패가 달려 있어 전투 시에는 노새를 풀어놓고 전차의 측면을 적군을 향하도록 돌려놓도록 하였다. 그리고 한 대의 전차에는 불랑기(佛狼機)라는 서양식 소형 화포 두 문씩을 배치하고 조총을 가진 병사들을 배치하여 사격할 수 있도록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러나 척계광은 강력한 후원자였던 장거정이 1582년 사망하자 이듬해 계주의 총병(總兵)에서 물러나 남방의 광동총병(廣東總兵)으로 전보되었다. 이는 그의 군사적인 실권이 상실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곧 병이 악화되어 고향으로 물러났다가 1587년 12월 8일에 사망하였다. 척계광은 1583년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연병실기』를 완성할 뿐만 아니라 이미 간행된 『기효신서』의 내용을 수정하고 『연병실기』의 내용 중 필요한 내용을 『기효신서』에 보완하였다. 그의 사후 이승훈이 14권 체제의 이른바 ‘이승훈본’ 『기효신서』를 간행하였다. ‘이승훈본’ 『기효신서』는 다른 판본과 달리 체제상 기존의 18권에서 14권으로 바뀌었고 각 권 목차와 내용에 있어서도 많은 부분 차이가 있다. 이 ‘이승훈본’ 『기효신서』는 척계광 은퇴 이후 내용이 보완되었으므로 그 이전의 판본보다 체제와 내용 면에서 보다 짜임새가 갖추어지고 풍부해졌다.

서지 사항

『연병실기』는 정집(正集) 9권으로서 잡집(雜集) 6권과 부도(附圖) 60도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6책이다. 정집 9권의 목차는 연오법(練伍法), 연담기(練膽氣), 연이목(練耳目), 연수족(練手足), 연영진(練營陣) 4권, 연장(練將)으로 이루어져 있다. 잡집은 저장통론(儲將通論) 상·하, 장관도임(將官到任), 등단구수(登壇口授), 군기제해(軍器制解), 거보기해(車步騎解)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성/내용

『연병실기』는 척계광이 북방의 기병에 대항하고자 전차를 중심으로 하여 보병과 기병을 동시에 활용하는 전술을 수록하였다. 특히 『기효신서』의 절강병법이 살수 위주의 보병 전술을 채택하고 있는 것과 달리 『연병실기』에서는 전차와 기병, 보병을 배합한 전술을 구사하고, 무기도 당파 등 기존의 단병(短兵)과 함께 조총과 쾌창, 그리고 화전(火箭) 등의 화기를 아울러 갖추도록 하여 적 기병의 공격을 먼 거리에서부터 막을 수 있도록 한 점은 중요한 시사를 주었다. 기병의 경우 조선의 병서인 『진법』에서는 궁시(弓矢)장창(長槍)만을 장비하고 화약무기는 장비하지 않았으나, 『연병실기』에서는 기병들도 원거리 무기인 장병(長兵)과 근접전 무기인 단병을 함께 장비하도록 하여 조총 등 여러 화기를 함께 장비한 점이 매우 특징적이다. 즉 보병의 대(隊)와 마찬가지로 조총수(鳥銃手)와 쾌창수 각 2명을 두도록 하되 조총수는 쌍수도를, 쾌창수는 쾌창(快鎗)에 붙은 긴 자루의 곤봉(棍棒)으로 단병접전을 하도록 하였다. 단병을 가진 당파수(鎲鈀手), 도곤수(刀棍手), 대봉수(大棒手) 각 2명의 경우에도 당파수는 화전을, 도곤수와 대봉수는 궁시를 각각 가지도록 하여 장병과 단병을 함께 장비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연병실기』의 기병 편성은 조선전기의 기병 편성보다 다양한 단병기로 무장하고 여기에 화력을 대폭 보강한 특징이 있다.

이와 함께 『연병실기』에는 전차를 활용하였으므로 이를 다루는 거병(車兵)이라는 병종이 있는 점이 큰 특징이다. 평탄한 야전에서 적 기병의 일제 공격을 받을 경우, 각종 화기 등으로 사격한다 하더라도 당시 화기의 성능상 기병의 일제 돌격을 완전히 저지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척계광은 평탄한 중국 북방의 지형적인 특성과 몽고 등 북방 기마 민족의 전법을 고려하여 포차의 기동성과 불랑기의 뛰어난 살상력을 결합한 전법을 고안하였다. 이 전법은 수레 주위에 방패를 설치하고 불랑기 2문을 장치한 전차를 제작하고 128량의 전차를 사방으로 둘러싸고 그 안에 기병과 보병을 두어 불랑기 등의 사격으로 적의 대형이 흩어지면 기병과 보병을 돌격시켜 적군을 공격하는 거영(車營) 전법이었다.

거영의 기본 단위는 전차 1량을 중심으로 거병을 편제한 ‘종(宗)’으로, 그 편성은 먼저 전차를 운용하고 그 속에서 불랑기 등을 조작하는 정병(正兵) 10명과 전차 주위에서 조총 등을 사격하는 기병(奇兵) 10명으로 각각 한 대를 편성하도록 하였다. 정병대(正兵隊)는 지휘자인 거정 1명과 불랑기 2문을 조작하는 불랑기수(佛狼機手) 6명, 화전을 사격하는 화전수(火箭手) 2명, 그리고 전차의 뒤에서 조정하는 타공(舵工) 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병대는 전차의 좌우에서 전차를 보호하고 전차 사이로 들어오는 적 기병을 공격하는 부대로서 대장(隊長) 1명과 조총수 4명, 등패수 2명, 당파수 2명, 그리고 화병(火兵) 1명으로 이루어졌다.

보병의 경우 그 이전 살수(殺手) 중심의 대에 다양한 화약무기를 배치하여 화력(火力)을 충실히 강화한 편제를 채택하였다. 『기효신서』에서는 한 대에 당파수(鎲鈀手) 2명에게만 일종의 로켓 화기인 화전 30발을 지급하여 당파에 걸쳐놓고 사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조총은 한 사(司)의 5개 초(哨) 중에서 한 초만을 따로 편성하였다. 이에 비해 『연병실기』에서는 보병 각 대마다 대총(隊總) 뒤에 조총(鳥銃)과 쌍수장도(雙手長刀)를 가진 오장(伍長) 2명을 두고, 이어서 장병쾌창수(長柄快鎗手) 2명을 두도록 하였다. 장병쾌창수의 뒤에는 등패수(藤牌手) 2명, 낭선수(狼筅手) 2명, 그리고 화전을 장비한 당파수 2명을 배치하였다.

쾌창(快鎗)은 길이 2자(약 60㎝)의 총신이 짧은 개인용 화기의 일종으로 5자(약 152㎝)의 곤봉 앞에 부착하여 사격하도록 한 것으로, 사격 후에는 돌려서 곤봉을 사용하여 적과 근접전을 하도록 하였다. 장전은 전장식(前裝式)으로 대두(大豆)만 한 연환(鉛丸) 20개를 넣고 사격하도록 하였는데 최대 사정거리는 470m 정도였다고 한다. 쾌창은 조총과 달리 가늠쇠인 조성(照星)도 없고 총열도 짧아 명중률과 위력에서는 조총에 비해 현격히 떨어졌지만, 조총과 함께 대의 화력을 보강하고 사격 후에는 곤봉으로 사용할 수 있어 여러 면에서 유용하였다.

전차를 활용한 전법은 조선초기 세종대에 이미 제안되기는 하였으나 이때의 전차는 『연병실기』와 달리 그 속에 화포를 장비한 형태는 아니었고, 조선의 산천은 험하고 도로가 좁아 사용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기병 전력이 충실하여 여진 기병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으므로 따로 속도가 느린 전차를 제작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수레 위에 신기전(神機箭) 등을 연속으로 사격하는 발사 틀을 올린 화차를 다수 제작하여 여진 기병을 공격하거나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데 활용하였다. 그렇지만 화차는 화력 지원용으로만 사용되었을 뿐 전법상 주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이에 비해 『연병실기』의 전법은 전차를 중심으로 하여 보병과 기병을 함께 활용하였으므로, 기병이 부족한 조선에서는 여진 기병을 저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인식되었다.

『연병실기』가 조선에 전해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임진왜란 중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군을 통해 여러 종류의 병서와 함께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선조실록』 33년 12월 7일). 특히 북방 여진족의 위협이 증가하자 1604년(선조 37) 말경에는 이 책이 북방의 기병을 제압하는 데 적절한 전술 체계를 갖춘 병서라는 점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검토를 시작하였다(『선조실록』 37년 12월 16일). 이에 1606년(선조 39) 9월 병조에서 훈련도감에 보관된 『연병실기』의 필사본 한 책을 바탕으로 수십 권을 활자로 간행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9년 9월 3일). 이후 조선의 대기병 전술의 기본 병서로서 주목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만기요람(萬機要覽)』
  • 『대전회통(大典會通)』
  • 『일성록(日省錄)』
  • 『기효신서(紀效新書)』
  • 『연병지남(練兵指南)』
  • 노영구, 「조선 증간본 기효신서의 체제와 내용」, 『군사』36, 국방부, 1998.
  • 노영구, 「조선후기 병서와 전법의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 宇田川武久, 『東アジア兵器交流史の硏究』, 吉川弘文館,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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