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손(朴星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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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0년(세종 2)~ 미상]. 조선 전기 세조~성종 때 활동한 무신, 명장이다. 행직(行職)은 전라도병마사(全羅道兵馬使)이다.

세종~성종 시대 활동

1455년(세조 1) 12월 행 사정(行司正)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그 뒤 창성부사(昌城府司)가 되었다가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되었다. 1466년(세조 12) 평안도병마우후(平安道兵馬虞侯)가 되고, 1467년(세조 13)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가 1469년(예종 1) 경상우도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가 되었다.

1474년(성종 5) 평안도(平安道)에 야인(野人)들이 침입할 우려가 있어 평안도조전절제사(平安道助戰節制使)로 임명되어 창주진(昌洲鎭)·창성(昌城) 등의 수비를 맡았다. 1475년(성종 6) 야인 수천 명이 창주(昌洲)를 여러 겹으로 포위, 성이 함락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창성에서 정예 25기(騎)를 인솔하고 달려와 성안의 군민을 규합, 필사의 노력으로 적과 싸워 격퇴하고 성을 구하여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476년(성종 7) 8월 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그 뒤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가 되었는데, 1478년(성종 9) 1월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그 해 5월에 돌아왔다. 같은 해 8월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가 되었으며, 1479년(성종 10) 2월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1481년(성종 12) 5월 영안북도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가 되었다. 1483년(성종 14) 사복장(司僕將)이 되었는데, 이때 육진(六鎭)의 방수(防守)에 대한 상서(上書)를 하였다. 1484년(성종 15) 11월 병조 참판(參判)이 되었고, 1487년(성종 18) 10월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으며, 1488년(성종 19) 2월 훈련원(訓鍊院)도정(都正)이 되었는데, 이때 특진관(特進官)을 겸하였다. 1489년(성종 20) 4월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가 70세가 넘었으므로 기력(氣力)이 쇠약하여 고달프고 정신이 흐리다는 것을 들어 변장(邊將)으로 부적합함을 우승지홍흥(洪興)이 아뢰었다. 그러자 성종은 “그는 용맹과 힘이 특이한 장수였다. 이제 이미 늙기는 하였지만, 과연 부축하여야 다니게 된다면 변장의 소임에 맞지 않겠다. 그러나 장수를 진퇴(進退)함은 국가의 중요한 일이니, 그가 변방에 합당한지 않은지를 속히 이조와 병조에 물어보는 것이 가하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성종이 그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알 수 있다. 1490년(성종 21) 4월 다시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