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효통(兪孝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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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 ?]. 조선 전기 세종(世宗) 때의 문신이자 의학자. 집현전(集賢殿)부제학(副提學), 병조 참의(參議),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행원(行源)이고, 호는 백원(百源)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공조 전서(典書)를 지낸 유현(兪顯)이고, 할아버지는 군기시사(軍器寺事)를 지낸 유성리(兪成利)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유승계(兪承桂)이다. 의약에 정통하여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등을 편찬하였고, 문장에도 뛰어나 『동문선(東文選)』에 몇몇 작품이 남아 있다.

세종 시대 활동

1408년(태종 8)에 식년시 병과에 급제하였고, 1427년(세종 9)에 중시(重試) 을과에 급제하였다.[『방목(榜目)』] 1418년(세종 즉위년)에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고, 그 뒤에 집현전 수찬(修撰)과 집현전 응교(應敎),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 집현전 부제학, 공조 참의(參議),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병조 참의, 중추원 동지사, 중추원 부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세종실록』세종 즉위년 8월 27일 1번째기사],[『세종실록』세종 2년 3월 16일 1번째기사],[『세종실록』세종 7년 12월 10일 3번째기사],[『세종실록』세종 9년 3월 20일 1번째기사],[『세종실록』세종 17년 6월 15일 3번째기사],[『세종실록』세종 18년 6월 3일 1번째기사],[『세종실록』세종 20년 8월 13일 2번째기사],[『세종실록』세종 21년 12월 9일 2번째기사],[『세종실록』세종 26년 2월 7일 1번째기사],[『세종실록』세종 26년 7월 1일 2번째기사],[『세종실록』세종 26년 7월 29일 6번째기사],[『세종실록』세종 26년 10월 6일 3번째기사] 1433년(세종 15)에 의학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1435년(세종 17)에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주석서에 해당하는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가 완성되었는데 이 두 책의 집필에 모두 참여하였다.[『세종실록』세종 15년 6월 11일 3번째기사],[『세종실록』세종 17년 6월 8일 1번째기사]

1440년(세종 22)에는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발령받고도 자신의 본관이 경주이고 노비가 거주하는 곳이며 부인이 아프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않다가 왕명을 피했다며 국문을 당했다. 이를 두고 앞서 경주부윤들이 부임했다가 잇달아 죽은 것을 보고 미신에 휘둘려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하였다.[『세종실록』세종 21년 12월 9일 2번째기사],[『세종실록』세종 22년 1월 14일 1번째기사],[『세종실록』세종 22년 1월 11일 2번째기사],[『세종실록』세종 22년 1월 12일 2번째기사],[『세종실록』세종 22년 1월 12일 3번째기사] 그 결과 고신(告身)을 수탈당했으나,[『세종실록』세종 22년 1월 14일 1번째기사] 1년 뒤에 다시 돌려받았다.[『세종실록』세종 23년 10월 10일 3번째기사] 세조(世祖) 때에 2등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올랐다.[『세조실록』세조 1년 12월 27일 3번째기사]

한편 그가 당시에 남긴 시 중 일부가 『동문선(東文選)』에 전하는데 대표작으로 「춘일소양강행(春日昭陽江行)」, 「차강릉 동헌운(次江陵東軒韻)」, 「청면금은표(請免金銀表)」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유효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문장과 해학에 능하기로 유명했다. 일찍이 집현전에서 여러 학사와 더불어 시 짓는 공부를 논하였는데, 유효통이 말하길 “옛 사람의 시는 삼상(三上)에서 더욱 생각할 수 있다 하였으니, 마상(馬上)·침상(枕上)·측상(廁上)이었다. 나는 그렇지 않고 삼중(三中)에 있다”하였다. 주변에서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한중(閒中)·취중(醉中)·월중(月中)이다”하여 여럿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삼중이 과연 삼상보다 낫다”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필원잡기(筆苑雜記)』],[『해동잡록(海東雜錄)』]

아들 중에 유목로(兪牧老)가 정승(政丞) 황보 인(皇甫仁)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당시의 풍속에 장가들 때 돈 많은 사람은 반드시 진귀한 보물을 함에 담아 예물로 보냈다. 많이 보내는 사람은 3, 4개의 함에 이르렀는데, 그의 아들도 2개의 함을 예물로 하였다. 황보 인이 함을 재촉하여 들여다가 손님 앞에서 열어보니, 모두가 책뿐이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나중에 황보 인이 사돈인 유효통을 만나, “혼인날 예물함에 왜 책만 넣어 보냈습니까?”하고 물으니, “황금이 상자에 가득 차 있더라도 자식에게 한 권의 경서(經書)를 가르치는 것만 못 하다란 말이 있으니, 혼인날 함에 어찌하여 책을 예물로 쓰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한다.[『청파극담(靑坡劇談)』],[『해동잡록』]

묘소와 후손

부인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목사(牧使)를 지낸 송전(宋琠)의 딸이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지만, 아들 셋의 이름만 전한다. 1남 유목로는 영천 황씨(永川皇氏)황보 인의 딸과 결혼하였고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을 지냈다. 2남 유원로(兪元老)는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3남 유신로(兪臣老)는 오완(吳浣)의 딸과 혼인하였고 성균관 전적(典籍)을 지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문선(東文選)』
  • 『청파극담(靑坡劇談)』
  • 『필원잡기(筆苑雜記)』
  • 『해동잡록(海東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