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朴泰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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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60년(현종 1)~1722년(경종 2) = 63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경종(景宗) 때의 문신. 부평현감(富平縣監)과 황주목사(黃州牧使) 등을 지냈으며,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자는 경구(景久)이고, 호는 회와(悔窩), 또는 일우(一愚), 송담(松潭)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박세성(朴世城)이고, 어머니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형조 참판송시길(宋時吉)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를 지낸 박환(朴煥)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참봉(參奉)박동민(朴東民)이다.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성천부사(成川府使)신여석(申汝晳)의 딸이다. 정조(正祖)의 후궁으로 순조(純祖)를 낳은 박수빈(朴綏嬪)의 고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숙종~ 경종 시대 활동

1689년(숙종 15) 진사(進士)가 되었는데, 그 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자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들을 이끌고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1697년(숙종 23) 휘릉참봉(徽陵參奉)을 거쳐서, 부평현감과 황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704년(숙종 30) 부평 현감 시절에 부평 경내에 있는 민진표(閔震標)의 산을 강제로 빼앗아 자기 처의 장지(葬地)로 삼고, 이를 반대하는 민진표를 협박하여 자결하도록 한 사실이 밝혀져 탄핵 당하였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30년 6월 1일] 그리하여 한 해가 지나도록 옥(獄)에 갇혀 있었다.[『숙종실록』숙종 30년 10월 20일]

1721년(경종 1) 합천군수(陜川郡守)가 되었으나, 이듬해인 1722년(경종 2)에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는 63세이다. 뒤에 고손녀인 박수빈(朴綏嬪)이 정조의 후궁이 되어 순조를 낳았으므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순조실록(純祖實錄)』순조 23년 2월 3일] 저서로는 시문집인 『반남박씨오세유고(潘南朴氏五世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사마방목(司馬榜目)』
  • 『서계집(西溪集)』
  • 『명곡집(明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