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절(權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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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2년(세종 4)~1494년(성종 25) = 73세]. 조선 전기 세종(世宗)~성종(成宗)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교리(校理), 사복시(司僕寺) 주부(注簿), 선전관(宣傳官), 대장소(大將所) 종사관(從事官), 위장(衛將)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단조(端操)이며, 호는 율정(栗亭),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 등을 역임한 권심(權審)이며, 어머니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밀직사(密直使)유계조(柳繼祖)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집의(執義)권엄(權嚴)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권중귀(權重貴)이다. 단종(端宗)에 대한 예로 세조(世祖)가 내린 벼슬을 수차례 거절했다하여, 남효온(南孝溫) 대신 그를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한다.

세종~성종 시대 활동

1477년(세종 29)에 친시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를 맡았고, 1453년(단종 1)에는 사복시 주부가 되었다.[『기년편고(紀年便攷)』] 이때에 살곶이 목장 근처의 땅을 영양위(寧陽尉)에게 주는 것이 부당하다는 의견을 올리기도 했다.(『단종실록』 1년 5월 21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으나, 듣지 못한 척하며 참여하지 않았다.(『숙종실록』 28년 8월 4일),[『기년편고』],[『율정난고(栗亭亂稿』] 그러나 1455년(세조 1) 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2등 공신에 봉해졌다.(『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1458년(세조 4)에는 선전관을 맡았으며(『세조실록』 4년 윤2월 7일), 이듬해 1459년(세조 5)에는 대장소 종사관이 되어 군사 훈련에 임하기도 했는데, 이때에 명령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금부(義禁府)에 하옥되었다가 파면을 당했다.(『세조실록』 5년 10월 13일),(『세조실록』 5년 10월 16일) 그 후 조정에서 수차례 관직을 내렸으나 병을 구실로 거절하였고, 성종 대에 이르러서야 위장을 역임하였다.(『성종실록』 22년 1월 4일)

한편 상왕이 된 단종(端宗)을 위해 그가 복상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복상록(服喪錄)』],[『어계선생집(漁溪先生集)』] 때문에 그를 생육신의 한 명으로 꼽기도 한다.[『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그는 숙종(肅宗) 대에 단종을 복위하고 묘호를 추존할 때에 이조 판서(判書)로 증직되고, ‘충숙’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유생들의 요청에 의해 그의 마을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기도 했다.(『숙종실록』 28년 8월 4일),(『숙종실록』 34년 윤3월 25일),(『숙종실록』 34년 12월 13일),[『기년편고(紀年便攷)』]. 또 영조 대에 영월 선비들이 팔현사(八賢祠)를 육신 사당 옆에 세웠는데, 그 또한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정보(鄭保)·성담수(成聃壽)와 함께 배향되었다.(『영조실록』 12년 6월 1일),[『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정조(正祖) 대에 그를 추가로 배향하자는 논의가 있기도 했다[.『홍재전서(弘齋全書)』],(『정조실록』 15년 2월 27일)

성품과 일화

세종 때 성균관(成均館) 학생과 여러 다른 학생 26명이 삼각산(三角山)의 덕방암(德方菴)에 놀러갔을 때, 권절도 그 무리와 함께 갔다. 이때 암자의 중이 다른 절의 중들을 불러 길옆에 숨었다가 북을 치며 한꺼번에 뛰어 나오니, 유생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두어 명은 습격을 당했다. 이 때 권절이 용감하게 돌을 던져 맞서며 중들을 물리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한다.(『세종실록』 24년 7월 21일) 문종(文宗) 때에도 권절이 사복(司僕)을 겸했다는 말과 무사의 기질이 많았다는 기록이 보이기도 하는데,(『문종실록』 즉위년 11월 23일) 이 때문에 그가 사복시에 있었던 기간이 꽤 길었던 것으로 보인다.(『세조실록』 2년 12월 23일) 다른 기록에서도 그가 문무의 재능을 겸비하여 세종이 특별히 병법과 무예를 단련시키라는 명을 했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기년편고(紀年便攷)』]

묘소와 후손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12-1번지에 그의 묘소가 있으며,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현석로 413번길 202-50에 그의 정려가 있다.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윤증(尹增)의 딸로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1남은 권자평(權自平)이고 2남은 권자균(權自均)이다. 권자균은 하동 정씨(河東鄭氏)정광조(鄭光祖)의 딸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다. 1녀는 영산 신씨(靈山辛氏)인의(引儀)신득함(辛得涵)과 혼인을 하였다.

참고문헌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기년편고(紀年便攷)』
  • 『복상록(服喪錄)』
  • 『어계선생집(漁溪先生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율정난고(栗亭亂稿)』
  • 『홍재전서(弘齋全書)』
  • 윤정, 「18세기 ‘단종제신’ 포장의 확대와 ‘生六臣’의 성립」, 『역사문화연구』36집 ,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