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평(蕩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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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붕당간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추구한 정치 이념.

개설

‘탕평(蕩平)’이란 용어는 『상서(尙書)』「주서(周書)」 홍범조(洪範條)에 나오는 말로서,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에게 전해준 홍범 구주(九疇) 가운데 제5주인 황극(皇極)에 들어 있는데, 임금의 정치가 최상의 상태에 이른 것을 표현하는 술어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의미를 가진 탕평이란 용어가 조선후기에 붕당간 갈등이 격화되어 왕조 국가의 위기를 맞게 되자 정치 이념으로서 새롭게 주목되었다. 숙종대 탕평론(蕩平論)이 제시되고, 영조·정조대에 본격적으로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하여 탕평정치(蕩平政治)가 전개되었다.

내용 및 특징

선조대 사림(士林)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당된 이후, 당쟁이 격화되어 국가는 위기에 빠졌다.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으로 인한 수난은 그 필연적 귀결이었다. 광해군대에 대북(大北) 정권을 무력으로 축출하고 성립된 인조 정권은 서인 주도하에 남인(南人)이 참여하여 정국을 운영하였지만, 양대 세력의 갈등은 현종대 예송(禮訟) 문제로 터져 나왔으며, 숙종대 환국(換局)이 반복되면서 상대 당파를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로 인해 부세 체제의 모순은 심화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였다.

숙종대의 이러한 국가적 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박세채(朴世采)의 탕평론(蕩平論)이 제출되었다. 박세채는 탕평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기초하여 주자(朱子)의 붕당론(朋黨論)을 비판하고 조제론(調劑論)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붕당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탕평론은 단순히 서인과 남인이 조정에서 공존하는 정국 운영론의 차원을 넘어서 변통(變通)과 경장(更張)을 추진할 수 있는 인재를 등용하여 국가 체제의 혁신을 추구하였다. 그는 당시까지 조선 왕조를 지탱해 오던 양반제와 지주제가 초래한 폐단을 중앙 집권 강화, 국가의 공적 영역의 확장, 공법 질서의 확립을 통해서 극복하고, 소농 경제의 안정에 바탕을 둔 새로운 국가 체제의 수립을 지향하였다. 양란기(兩亂期)에는 국가적 위기를 배경으로 주자학을 비판하는 흐름이 형성되어 실학(實學)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는데, 실학의 국가론이 바로 탕평론이었다. 이에 대해 송시열(宋時烈) 계열에서는 주자와 주자학을 절대화하고 주자 도통주의(道統主義)를 내세우면서 반발하여, 이에 대한 찬반을 두고 서인이 노론(老論)소론(少論)으로 분화되기에 이르렀다. 박세채의 탕평론을 받아들여 숙종대 후반 남구만(南九萬)·최석정(崔錫鼎) 등에 의해 추진된 탕평책은 노론 반탕평파의 반발로 좌절되기에 이른다.

변천

영조는 박세채의 탕평론을 수용하여 탕평책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이에 반발하는 주자 도통주의, 주자 절대주의를 존왕론(尊王論)과 군사론(君師論)으로 제압하려 하였다. 그리고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원용하고, 유수원(柳壽垣)의 주장을 따라서 대신 책임 정치를 구현하려 하였으며, 박세채와 최석정으로 이어지는 법전 편찬론을 수용하여 『속대전(續大典)』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소론 탕평파의 집요한 노력으로 오랜 기간 논란을 빚어온 양역(良役) 변통(變通) 논의를 균역법(均役法)으로 타결지었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은 많은 한계를 노출하였다. 양역변통 논의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소론 탕평파 계열이 균역법에 반대한 것은 그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더구나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전후하여 척신(戚臣)들이 탕평당(蕩平黨)을 형성하여 영조 탕평책을 왜곡하고 전횡을 일삼자, 탕평 정치는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여 제대로 실현될 수 없었다.

영조대에는 소론 완론(緩論)과 노론 완론이 탕평 정국을 주도하였는데, 노·소론 준론(峻論)은 모두 영조의 탕평책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 방향은 서로 달랐다. 노론 준론이 주자학 명분론과 의리론을 내세워서 사실상 탕평을 부정하였다면, 소론 준론은 변통론의 입장에서 영조 탕평책이 불철저하게 추진되는 것을 비판하였다. 소론 완론에는 박세채 문인과 그 후손이 주로 활동하였으며, 소론 준론에는 정제두(鄭齊斗) 문인들과 이광좌(李光佐)·유수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남인의 성호학파(星湖學派)에서는 오광운(吳光運)과 채제공(蔡濟恭)이 청남(淸南)으로 자처하면서 영조 탕평책에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사회·경제 개혁 논의에서 소론 준론과 그 입장을 같이 하였다.

정조대에는 탕평책 추진을 통해서 실학(實學) 사상을 정책에 반영하려는 노력이 적극적으로 시도된 시기였다. 이를 위해 정조는 주자학은 물론 유학(儒學)의 권도론(權道論), 명대의 양명학(陽明學), 청대의 고증학(考證學), 노장 사상, 심지어는 서학(西學)까지도 폭넓게 섭렵하면서 학문적으로 천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생부(生父)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에 얽힌 임오의리(壬午義理)마저도 적대 세력을 견제하고 제압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면모를 보였다. 정조는 토지 개혁을 포함한 봉건 제도의 제반 모순에 대한 개혁을 정치의 목표로 천명한 조선 왕조 유일의 군주였다. 그는 조선후기 개혁의 대척점에 서 있던 정통 주자학마저도 포용하면서 자신이 지향하는 개혁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군주도통설(君主道統說)을 내놓았다. 군주의 전제권이 주자학의 도통적 지위를 압도하는 초월적 존재임을 천명하려는 의도였다. 정조는 이러한 초월적 군주권에 입각하여 전반적인 제도 개혁을 탕평의 ‘대의리(大義理)’로서 추진하려 하였다.

당대의 어느 실학자 못지않은 개혁적 면모를 보인 정조는 자신의 국가 구상을 규장각(奎章閣) 각신들과 끊임없이 토론하고 실행 방안을 모색하였으며, 이에 반대하는 신료들을 설득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광범위한 여론 수렴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당대의 기라성 같은 실학자들이 정조의 국가 구상에 적극 부응하였다. 예컨대, 소론 실학의 일각을 형성하고 있던 서명응(徐命膺)·서호수(徐浩修)·서유구(徐有榘)로 이어지는 달성서씨 가문과 홍양호(洪良浩) 등 관인(官人) 실학자들, 남인 실학을 대표하는 채제공·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 등으로 이어지는 청남 세력 등이 바로 그러하였다.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 등 노론 북학파(北學派) 역시 정조 개혁 정책을 지원하고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정조대는 실학의 국가 구상에 대한 찬반을 두고 대대적인 힘겨루기가 전개된 시기로 규정할 수 있는데, 이것은 결국 정조 탕평책에 대한 찬반으로 나타났다.

정조대의 탕평 정국에서 군주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한 것은 기층 민중을 보호하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도시와 농촌에서 성장해 온 향반(鄕班)이나 역관(譯官)·서얼(庶孼)·상인(商人) 세력 같은 중간 계층을 정치 구조 속에 수용하려는 노력의 소산이었다. 이는 집권력 강화, 공적 영역의 확장, 공법 질서의 확립을 통해서 양반제로 대표되는 신분제와 지주제의 모순을 완화 내지 해소하고, ‘대동(大同)’과 ‘균역(均役)’을 구현한 새로운 국가를 지향하는 노력이었다. 영조대를 이어서 정조대에 더욱 활성화된 일련의 편찬 사업은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 가운데 이러한 새로운 국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요소들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이것은 이 시기 격렬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합의된 최소한도의 국가 규모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좌절되고, 19세기에는 탕평책을 부정하고,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전개되었다. 이것은 정치에서 진보·개혁 노선의 좌절이었으며, 자율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정치의 긍정적 역할이 사실상 정지된 것을 의미하였다. 이로 인해 피지배 농민층의 항쟁과 운동만이 근대화의 역사적 과제를 힘겹게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세기 후반 준비 없는 문호 개방으로 제국주의 침략의 위협에 몰리게 된 정치적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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