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실(胎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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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실 자녀의 태를 안치하기 위해 조성한 석실(石室).

개설

왕실에서는 출산 후 배출되는 태(胎)를 깨끗이 씻어 산실(産室) 안에 잘 보관해 두었다가, 태를 묻기에 적합한 좋은 땅을 골라 태봉(胎峰)을 선정하고 그곳에 태실을 조성하여 태를 안치하였다. 태실은 돌로 만든 함 모양이었는데, 태함 안에는 태를 넣은 태 항아리와, 태 주인의 생년월일과 태를 묻은 일시를 적은 태지석을 함께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실을 주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지에 조성해 특별하게 관리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왕의 태실을 포함하여 전국의 태실 54기를 오늘날의 경기도 고양시에 자리한 서삼릉으로 옮기면서 왕실의 태실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내용 및 특징

태는 임신한 여성의 자궁 안에서 자라나는 아이에게 생명을 전해 주는 실체이다. 새로운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태는 생명 탄생의 신비와 더불어 예부터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태를 처리한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20세기 중반까지도 사람들은 태를 불에 태우거나, 물에 띄워 보내거나, 땅에 묻는 방식으로 처리하였다. 대체로 불에 태우는 방식을 선호하였고, 태를 땅에 묻는 장태(藏胎)는 지역별, 계층별로 상당히 제한된 사례에만 적용되었다.

태를 매장하는 관습은 그 역사가 6세기 후반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김유신의 부모가 김유신의 태를 묻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 뒤 사람들은 김유신의 태가 묻힌 곳을 태령산(胎靈山)이라 불렀고, 이곳을 신령하게 여겨 김유신의 사우를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후 조선시대 사람들은 태를 묻는 관습이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사이에 시작되었으며, 중국에는 없는 우리 고유의 풍습이라고 여겼다[『선조수정실록』 3년 2월 1일].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태장경(胎藏經)』의 장태법을 따라, 좋은 땅을 가려 자녀들의 태를 묻었다. 태를 좋은 땅에 묻으면 태의 주인이 오래 살고 지혜롭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왕이나 원자, 원손과 같이 왕위를 계승할 자손의 경우, 조선 왕조의 흥망성쇠가 그 태에 달려 있다고 여겼다.

또한 당나라 때의 승려 일행(一行)이 고안한 육안태법(六安胎法)의 영향을 받아, 남자아이는 태어난 지 5개월, 여자아이는 3개월이라는 기준에 맞춰 자녀의 태실을 조성하였다. 왕위 계승자인 원자나 원손의 경우에는 특히 그 기준을 벗어나지 않으려 했으나, 그 외 왕실 자녀의 경우에는 태실을 조성하는 시기가 늦춰지는 사례도 많았다.

태조이성계는 자신의 태를 묻을 좋은 땅을 찾기 위해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권중화(權重和)를 지방으로 파견하였다. 1393년(태조 2) 1월 2일, 권중화는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에서 태를 묻을 길지를 찾은 다음 태조에게 산수 형세도를 바쳤다(『태조실록』 2년 1월 2일). 태조는 1월 7일에 다시 권중화를 보내 이곳에 태실을 조성하게 하였다. 그리고 당시 완산부에 속해 있던 진동현을 진주(珍州)로 승격시켰다. 태조의 태실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처음으로 조성된 것으로, 왕실에서 태실을 조성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평상시에 태실 증고사를 지방에 파견하여, 태실을 조성하기에 좋은 땅을 미리 찾도록 하였다. 태실 증고사는 전국을 다니며 찾은 태실 후보지를 모두 세 등급으로 나누어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 태실 후보지를 찾아 그 길함의 정도에 따라 세 등급으로 나누어 기록해 두었다가, 왕위 계승자인 원자와 원손은 1등 태봉에 태를 안치했다. 왕비 소생인 대군과 공주는 2등 태봉, 후궁 소생인 왕자와 옹주는 3등 태봉에 태를 안치했다. 왕실에서는 태실을 조성할 좋은 땅의 조건으로 높고 정결한 곳을 선호하였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들판 가운데 둥근 봉우리를 택하여 그 위에 태를 묻어 보관하고, 이를 태봉이라 불렀다[『현종개수실록』 11년 3월 19일].

그리고 왕실의 태실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태실 주변의 일정한 거리를 금지 구역으로 설정하고 금표(禁標)를 세웠다. 왕의 태봉은 1등급으로 300보, 대군의 태봉은 2등급으로 200보, 왕자의 태봉은 3등급으로 100보로 정하였다. 금표 안에서는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베는 행위를 금하였으며, 금지 구역에 속한 집이나 밭은 해당 주인에게 보상을 한 뒤 철거하였다. 또 태실을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태실을 수호하는 태봉지기를 선발하여 철저히 보호하게 하였다.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해당 백성을 엄하게 처벌했을 뿐 아니라, 태봉의 관리를 소홀히 한 태봉지기와 지방관도 함께 벌하였다.

한편, 태실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하면 태실 주변에 난간석과 비석 등을 새로 조성하는 의식인 태실가봉(胎室加封)을 하였다. 태실가봉에는 많은 인원과 물품이 필요하였다. 특히 석재를 구하여 태실이 위치한 태봉까지 옮기는 데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다. 그 때문에 태실가봉은 흉년을 피해서 주로 농한기인 가을 추수 후에 이루어졌다. 왕의 태실을 가봉한 뒤에는 태실을 보호하기 위한 금표도 200보에서 300보로 거리를 늘려 세우고, 수호하는 군사의 정원도 2명에서 8명으로 증원하였다. 태실가봉이 끝나면 『태실가봉 의궤』를 제작하였고, 태실가봉 후의 모습을 그린 태봉도(胎封圖)를 왕에게 바쳤다.

태실가봉은 태실 주변에 석난간·개첨석·중동석·상석·전석·표석·귀롱대(龜籠臺) 등과 같은 석물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천문과 지리 등을 맡아본 관상감과 토목과 영선을 맡아본 선공감에서 주로 담당했으나, 대부분의 인력과 물품들은 태봉이 위치한 인근 지방의 협조를 통해 조달하였다. 태실을 가봉할 때 가장 중요하고도 힘든 일은 석물을 조성하기에 적합한 돌을 구해 태봉 주변까지 옮기는 일이었다. 석재는 대개 한양에서 활동하는 석수인 경석수(京石手)를 파견해 태봉 근처에서 구하도록 했으나, 여의치 않을 경우 충주와 같이 좋은 석재가 많이 나는 지방에서 옮겨 오기도 했다.

변천

조선 전기에는 태실도감을 설치하여 모든 장태 과정을 총괄하게 했으나, 조선 후기에는 관상감에서 왕실의 장태를 담당하였다. 왕실의 태를 묻는 장소가 주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지로 정해졌으므로, 태실 조성을 감독하는 일은 지방관이 맡았다. 중앙에서는 안태사(安胎使)배태관(陪胎官) 등을 지방에 파견하였다. 특히 안태사는 태를 궁궐에서부터 안전하게 호위하여 지방에 조성한 태실에 안치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갈수록 농번기나 추운 겨울, 흉년에는 태를 묻기 위한 공사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왕들 또한 많은 인원과 물품이 동원되는 왕실의 장태로 인해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꺼렸다. 이러한 이유로 새로 태어난 왕실 자녀의 장태뿐 아니라, 왕으로 즉위한 뒤에 태실을 다시 단장하는 태실가봉 또한 몇 차례씩 미뤄지기도 했다.

또한 조선 후기에 인구가 증가하고 토지는 부족해지면서, 왕실 자녀의 태봉이 산 하나씩을 점유하여 민폐를 끼친다는 신하들의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그에 따라 1758년(영조 34)에 영조는 이와 관련하여 특별히 ‘태봉윤음(胎峰綸音)’을 반포하기도 하였다. 한 태가 산봉우리 하나를 차지하는 폐단을 지적했으며, 부모가 동일할 경우 왕실 자녀들의 태를 같은 산등성이에 함께 묻도록 하였다(『영조실록』 34년 3월 24일).

일제 강점기에는 전국에 산재한 왕실의 태실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등지에 조성된 태실은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당시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태실을 모두 옮기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태실에 안치된 태 항아리만 옮겼고, 그 뒤 원래 태실이 자리했던 땅의 소유자가 왕실에서 개인으로 바뀌면서 태실 주변에 남겨진 석물들은 파괴되어 흩어졌다. 이후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각 지방의 향토 사학자와 지역 박물관을 중심으로 태실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방 정부 차원에서 왕실의 태실을 지방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거나, 흩어진 석물들을 가져다 태실을 복원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三國史記』
  • 「列傳, 金庾信 上條」
  • 『增補文獻備考』
  • 『胎封』
  • 국립문화재연구소, 『국역 안태등록』, 민속원, 2007.
  •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실의 안태와 태실관련의궤』, 민속원, 2006.
  • 국립문화재연구소, 『西三陵胎室』, 1999.
  • 국립문화재연구소, 『國譯 胎封謄錄』, 2006.
  • 이규상, 『韓國의 胎室』, 청원군 청원문화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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