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冊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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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세자 및 비빈을 책봉하거나 존호와 시호를 올릴 때,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제작한 책문(冊文)과 보인(寶印).

개설

책은 책봉(冊封)시책(諡冊), 애책(哀冊)의 책문을 가리키며, 그 글을 봉책문, 시책문, 애책문이라 한다. 책문을 새긴 책간(冊簡)의 종류로는 옥책, 금책, 죽책 등이 있다. 보는 존호와 시호를 새긴 보인으로서, 그 종류로는 옥보, 금보, 옥인, 은인 등이 있다.

조선에서는 초기부터 책인(冊印)을 사용하였다. 1397년(태조 6)에 왕세자의 현빈심씨(賢嬪沈氏)에게 책인을 하사하게 하였다거나, 태상왕에게 존호를 올릴 때에는 옥책과 금보를 올렸다. 시보(諡寶)도 금보로 올렸는데, 그 체제는 전자(篆字)로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지보(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之寶)’라 새겼다.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과 태종 그리고 그들의 비에게 존호를 올릴 때에도 역시 옥책과 금보를 바쳤다. 태종을 세자로 봉할 때에는 죽책문(竹冊文)을 내렸다. 이때 “우리나라에도 동궁이나 빈에게 좋은 일을 칭찬하고 타일러서 훈계하는 뜻을 죽책을 두어 기록하게 했다.”고 하였다. 따라서 왕과 왕비는 옥책과 금보를, 왕세자와 왕세자빈에게는 죽책과 옥인 혹은 금인을 사용하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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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왕비에게 존호와 시호를 올릴 때에는 책보를 바치는 의례를 행했다. 이 의례는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서 행해졌는데, 그 의주가 『세종실록』 「오례」에 수록된 상시책보의(上諡冊寶儀)이다. 추숭된 왕인 덕종과 원종에게는 옥책만 올리고 금보를 올리지 않았다.

내용 및 특징

왕에게 올린 책간은 남양의 청옥(靑玉)을 사용했다. 길이는 9촌 7푼이고, 너비는 1촌 2푼이며, 두께는 6푼이고, 간수(簡數)는 글의 다소(多少)에 따른다고 하였다. 왕세자는 그 규격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없으나, 왕의 옥책보다 조금 작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책(冊)은 한나라 때부터 있었던 제도이나 그 연원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송나라 때의 친사(親祠)에는 죽책을 사용하였는데, 그 재질은 대나무였으며 책마다 24간을 썼다. 오직 천자는 옥을 쓰고, 왕공은 모두 죽책을 사용했다고 하였으니, 조선의 왕은 천자의 예를 따라 옥을 쓰고 왕세자는 왕공의 예를 따라 죽책을 사용했다고 하겠다. 한나라 때의 책에는 그 책문의 글을 쓰지 않다가, 당 태종 때 진왕(晉王) 이치(李治)를 책봉하여 황태자로 삼을 때 책문을 썼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 이후의 제도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보인의 규격은 세종 때의 기록을 살펴보면, 대보는 너비가 3촌 5푼이며, 중궁의 인은 3촌 4푼이나 2푼이었다. 그리고 왕세자의 인은 너비가 3촌이었다. 두께는 중궁의 인이 7푼, 왕세자의 인은 6푼, 세자빈의 인은 5푼으로 하도록 하였다.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에는 왕의 보에 대해서 “주석으로 주조하고 황금으로 도금한다. 사방 3촌 5푼, 두께 8푼, 귀(龜)의 높이 1촌 5푼이다.”라 하여, 두께의 경우 중궁의 인과는 1푼, 왕세자의 인과는 2푼의 차이가 난다. 보인의 크기는 지위에 따라 일정한 차등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왕세자의 인은 각 기록을 통해서 보면 은 바탕에 도금을 했거나 옥인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에서도 ‘왕세자인은 옥으로 개조한다.’고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은 바탕이 아닌 백철(白鐵)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왕세자인의 재질은 은을 도금하기도 했지만, 주로 옥을 사용했다.

변천

조선초기에는 책간의 수가 글자의 다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쪽수와 규격을 제정하기도 했다. 1420년(세종 2) 9월에 제정한 유거(柳車) 제도에 수록된 옥책의 규격과 봉과법을 살펴보면, 옥책과 시책이 56쪽이며 애책이 56쪽인데, 모두 써서 대쪽에 새긴다고 했다. 대쪽은 길이가 6치, 너비가 7푼, 두께가 4푼이다. 붉은 당사실로 꼬아 엮고, 비단실로 선을 둘러서 붙이며, 붉은 궁초 보로 싸서 각각 함에 넣는다. 함은 나무로 만들어서 그 거죽은 칠하고 안은 누른 능견으로 바르며, 자물쇠를 갖추고, 붉은 궁초 보로 싼다.

그런데 1422년(세종 4) 9월의 의장 제도를 보면, 간수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옥책으로는 시책이 48간, 애책이 84간인데, 모두 써서 새긴 것이라 하였다. 반면에, 간(簡)의 규격과 봉과식은 같았다.

왕과 왕비에게 책보를 올릴 때의 보인은 선조 연간부터 옥보로 만들어 올리기도 했다. 옥보에 새기는 칭호의 순서는 존호, 휘호, 시호이나, 선후가 바뀌기도 하는 등 일정하지 않았다. 특히 왕의 경우에는 묘호를 넣거나 생략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숙종의 금보에는 묘호를 생략하고 시호만을 새기도록 했다.

세자빈의 경우에는 1718년(숙종 44) 2월의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시책과 애책은 대나무를 사용하고, 시인(諡印)은 옥에 새겼다(『숙종실록』 44년 2월 17일). 시인의 척도는 1645년(인조 23)의 의궤에서는 사방이 3촌 5푼이고 두께가 7푼이며 귀부(龜趺)의 높이가 1촌 5푼이었지만, 1696년(숙종 22) 가례(嘉禮) 때의 의궤에는 사방이 3촌 6푼이고 두께가 8푼 5리이며 귀부의 높이가 2촌 1푼이었다. 이처럼 척도에 있어서는 일정하지 않은 사례가 많았는데, 이때에는 가례 때의 척도를 사용해 생시(生時)를 상징하는 뜻에 합치하도록 했다. 그리고 시책문에 글자를 쓰는 데에는 금을 사용하도록 했고, 애책은 푸른 글자를 쓰는 것이 의심스러워 붉은 글자를 쓰도록 했다.

의의

조선에서 왕과 왕세자, 비빈의 공덕을 드러내고 역명(易名)하여 이를 책간과 보인에 새기는 것은 효와 공경의 실천임과 동시에 그 공덕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왕과 왕실의 위신은 더욱 높아질 수 있었다. 따라서 책보는 왕과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서 그 의미가 매우 깊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
  • 『대명집례(大明集禮)』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