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천(自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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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문관(藝文館)·이조(吏曹)·병조(兵曹)에서 후임을 전임 관원이 선발하는 방식 또는 제도.

개설

조선시대 관직은 관료제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다. 인사(人事)도 해당 관청 당상관이 선발하고, 필요한 경우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의 양사(兩司)에서 심사하고 동의하는 서경(署經)을 거쳐 이조에서 임명하는 형식을 띠었다. 그런데 이런 일반적인 인사 운영과는 달리 예문관 참하관인 봉교·대교·검열 등의 사관(史官)과, 이조·병조의 전랑(銓郞)은 후임을 전임자가 선발하는 자대제(自代制), 자천제(自薦制)로 운영되었다.

사관은 참하관이고 낭관은 참상관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들에 대한 직무 독립성을 보장하는 제도였다고 할 것이다. 역사 기록을 담당하는 관원과 인사를 담당하는 관원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다는 것은 조선 관료제의 특징 중 하나였다.

내용 및 특징

시기적으로 자천제가 먼저 성립한 것은 사관이었다. 사관 자천제가 성립된 것은 고려말로 생각된다. 고려 충선왕 복위년의 관제 개편으로 직사관이 3명으로 조정되고 또 이들이 품관화되면서 사관에는 내부적인 위계질서가 형성되었다. 이차천전(以次遷轉), 즉 관청 내에서 차례로 승진하게 된 관례 때문에 사관의 내부적 위계질서는 더욱 강해졌다. 춘추관이라는 관청 차원에서 보면, 참상관 이상 관원이 모두 겸직으로 운영되어 참하관이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자천제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으로서의 사명감이 강해지고 전문성이 높아지면서 관직 구조상에도 변화가 생겼다. 고려말에는 예문춘추관의 참하관 8명에게 사관의 임무를 맡겼다. 이들의 임무 수행을 위해서는 내적 결속이 필요한 반면 상하 관원 사이의 위계질서는 약해질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사관의 직임을 수행하고 있던 예문관의 참하관을 위해 참상관 이상에게는 경연관으로서의 역할을 맡겨 예문관을 이원화하였다. 또한 참상관 이상은 모두 겸직으로 운영되도록 하여 참하관은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관의 자천제가 성립되었다.

1417년(태종 17)에는 사관의 선발·임명도 다른 관리의 선발과 마찬가지로 이조에서 하도록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사관 자천제는 그 관례를 지속해갔다. 이렇게 상급 관원의 통제에서 벗어나, 참하관인 사관이 자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우선 사관이 그 임무를 수행하는 데 독립적인 지위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관 선발에서 다른 절차가 아닌 사관들 자신의 판단에 의한 선발이라는 방식을 취했다는 점은, 단순히 사관의 선발만이 아니라 조선시대 관료제 운영의 원리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있다.

사관에게 자천권을 인정했던 이유는 앞서 들었던 관직 구조상의 특수성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을 문풍(文風)을 유지하는 관원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사관은 당시 지식인 사회의 학자적 분위기를 좌우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사관의 자천제를 통해 사관에게 어떤 규정을 가하거나 감독하기보다는 사관이 알아서 판단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런 자천제로 인해 발생하는 폐단도 있었는데, 바로 신참 사관에 대한 침학(侵虐)이었다. 다른 관청에도 현재의 신고식에 해당하는 신참례는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예문관이 가장 심했다. 신입 관원이 선임 관원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면신례(免新禮)와 허참례(許參禮)에 드는 비용은 예문관이 승문원의 몇 배에 달하였다고 한다. 또 선생이나 구주(舊住) 등 전임자에게도 면신례가 끝날 때까지 식사를 대접하고, 투자(投刺)라 하여 명함[刺紙]을 선물로 준비했다. 이런 예를 감찰이나 녹사·내금위(內禁衛)·성중관(成衆官)들까지 본받았다고 한다. 이런 폐단은 다른 관원들이 예문관에 임명되는 것을 꺼리는 이유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한편, 낭관의 자천제는 성립이 조금 늦었다. 낭관은 조선시대 이조·병조의 정5품 정랑(正郞)과 정6품 좌랑(佐郞)을 통칭하던 말이다. 내외 문·무관을 천거(薦擧)·전형(銓衡)하는 데에 가장 큰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별칭이 생기게 된 것이다. 조선후기로 오면서 낭관은 문반 당하관의 인사를 주도하는 이조의 정랑·좌랑을 주로 일컫는 말이 되었다. 또한 다른 조(曹)의 낭관을 조랑(曹郞)이라 하고 이조와 병조의 낭관은 전랑이라 하였다.

전랑은 전랑천대법(銓郞薦代法) 또는 전랑법(銓郞法)이라고도 하는 자대제를 가졌다. 이 외에 통청권(通淸權)·낭천권(郞薦權)을 가졌는데,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판서·참판·참의가 당상관 이하 이조의 인사권을 주도했다. 자대제는 현임 전랑이 후임 전랑을 천거하는 권리이고, 통청권은 당하청 요직(要職)을 선발하는 권리인데 모두 1516년(중종 11)경에 시작되었다. 낭천권은 전랑이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현사(賢士)를 추천하여 벼슬에 직통하게 하는 권리로서, 1569년(선조 2)에 시작되었다.

이들의 권한은 해당 판서는 물론 의정부의 삼정승(三政丞)도 간여하지 못했다. 가장 중직(重職)으로 꼽혔던 삼사(三司), 즉 사헌부·사간원·홍문관(弘文館)의 관원 임명은 반드시 이조 전랑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등 거의 모든 인사권을 이들이 좌우하였다. 이처럼 전랑에는 장관인 판서(判書)도 간여하지 못하는 특유의 권한이 부여되어 있어 전랑은 낮은 품계에 비해 중요한 관직, 즉 요직으로 꼽혔다.

변천

사관과 전랑의 자천제는 모두 영조 때 변화를 맞았다. 먼저 폐지된 것은 낭천(郎薦), 즉 전랑의 자천권이었다. 이는 동서 분당의 원인으로 새삼스럽게 지목되면서 탕평(蕩平)을 추구하는 영조의 방침에 따라 폐지되었다.

또한 300년 이상 이어져온 사관 자천제는 1741년(영조 17)에 이르러 변화를 맞았다. 사관을 새로 천거하는 과정에서 당색에 따른 임명 경향이 두드러지자 이미 전에 별겸춘추(別兼春秋)를 임명하여 사관을 천거토록 하는 조치가 몇 차례 있는 등, 변화의 조짐이 있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직접적으로 보면 당쟁에서 연유하기도 했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탕평을 추구했던 영조의 정국 운영 구도의 결과였다. 그러나 길게 보면 한림 자천제로 상징되는 사관 제도가 긴장감을 상실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사관 자천제는 1741년 3월 유수원(柳壽垣)이 올린 관제서승도(官制序陞圖)를 계기로, 붕당 혁파 정책의 일환으로 혁파되었다. 그리고 한림 자천제를 대신하는 한림회권(翰林會圈)을 시행할 목적으로 10조에 걸친 「한천이정절목(翰薦釐正節目)」을 의정하였다. 이 조치는 한림권점(翰林圈點), 즉 한림본관권점(翰林本館圈點) → 도당권점(都堂圈點), 즉 한림관각회점(翰林館閣會點) → 한림소시(翰林召試)로 정리되어, 『속대전(續大典)』에 실리게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오항녕,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일지사, 2009.
  • 최이돈, 『조선중기 사림정치 구조 연구』, 일조각, 1994.
  • 오항녕, 「여말선초 사관 자천제의 성립과 운영」, 『역사와 현실』 30, 1998.
  • 오항녕, 「조선후기 국사체계의 변동에 관한 시론: 실록에서 『일성록』으로」, 『역사와현실』 52, 2004.
  • 오항녕, 「조선후기 실록 편찬 관례의 변화」, 『국사관논총』 105,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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