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면(閔周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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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9년(인조7)~1670년(현종11) = 42세]. 조선 중기 효종~현종 때의 문신. 자는 장오(章五), 호는 수월당(水月堂)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목사(牧使)민진량(閔晉亮)이고, 어머니 기계유씨(杞溪兪氏)는 첨정(僉正)유대칭(兪大偁)의 딸이다. 호조 판서민성휘(閔聖徽)의 손자이고, 사헌부 지평(持平)이백린(李伯麟)의 매부이다.

효종 시대 활동

1648년(인조26)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3년(효종4) 알성(謁聖)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공조 · 예조 · 병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는데,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로 나갔다가,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고,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옮겼다. 1657년(효종8) 장흥현감(長興縣監)으로 나갔는데, 호강(豪强)한 토호들을 위엄으로 제압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쉬다가 다시 병조 정랑이 되었다. 또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로 나갔다가, 세자 시강원 사서(司書)에 임명되었다.

현종 시대 활동

1659년(현종즉위) 사간원 정언(正言)과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고, 1660년(현종1) 인천부사(仁川府使)로 나갔다. 그때 전국에 흉년이 들어서 모든 백성들이 굶주리자, 그가 “상평창(常平倉)에 있는 미곡을 방출하여 고을의 규모에 따라서 차등 있게 나누어 주소서.”라고 청하여, 전국 모든 고을의 기민(饑民)을 구제하였다. 또 경내에 있는 자연도(紫燕島)에 보호 방벽을 수축하고 무기를 수선하여 방비 시설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1661년(현종2)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가, 훈련도감 낭청(郎廳)으로 차출되었는데, 이때 모친상을 당하였다. 3년 상기(喪期)를 마치고 1664년(현종5)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이천부사(利川府使)로 나갔다. 1665년(현종6)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고 길주목사(吉州牧使)에 임명되었다. 미처 부임하기 전에 광주부윤(廣州府尹)에 초수(超授)되었는데, 그는 광주(廣州)가 수도를 방어하는 중요한 요충지이므로 국가의 흥망에 관계된다고 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여 봉공(奉公)하였으나 파직되었다. 1667년(현종8)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장례원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가 다시 승정원으로 들어가서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1669년(현종10)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는데, 고을의 번잡한 행정을 개혁하여 간략하게 만들고, 공무의 여가에는 편자 미상의 『동경지(東京志)』라는 경주 읍지를 증보하여 『동경잡기(東京雜記)』를 간행하였다. 병으로 벼슬을 그만둔 지 얼마 안 되어 1670년(현종11) 12월 6일 병으로 갑자기 죽었는데, 향년이 42세였다.

저서로는 그가 증보한 『동경잡기』 3권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민주면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겉모양은 단아하고 부드러웠으나, 속마음은 굳세고 강하였다. 또 자상하며 화락한 것을 좋아하고, 잔인하고 포악한 것을 아주 싫어하였다. 재예(才藝)가 차고 넘쳐서 자기 문장을 가다듬는 법이 없었다. 진취(進取)에 조급하지 않았으므로 벼슬이 그다지 높지 못하였다.

1669년(현종10) 그가 경주부윤에 임명되었을 때 경주는 수토(水土)가 좋지 않아서 부임하는 사람이 번번이 병이 났으므로, 그에게 부임하지 말 것을 권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웃으면서, “내가 어찌 출세를 하기 위하여 간사한 재주를 부리는 사람이란 말인가? 순조롭든 험난하든 이를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로서의 도리이다.” 하였다. 그는 부임해서 고을의 번잡한 행정을 개혁하여 간략하게 하였으며, 황폐한 왕릉과 고적을 수리하였다. 경주는 실로 이름난 고도(古都)이지만, 사적(史蹟)이 1천 년도 못되는데도 고증할 만한 전적(典籍)이 없었다. 마침 편자 미상의 『동경지』라는 경주 읍지가 있었는데, 그가 향중(鄕中)의 인사 이채(李採) 등과 함께 이를 증보하여 『동경잡기(東京雜記)』 3권을 간행하였다. 그는 공무 중에 여가를 이용하여 이 책을 편찬하다가, 마침내 병을 얻었다. 병으로 경주부윤을 그만둔 지 얼마 안 되어 40대의 한창 나이에 죽고 말았다.

비문과 후손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전라도관찰사이시만(李時萬)의 딸이고, 사헌부 지평이백린(李伯麟)의 누이인데, 아들이 없었다. 양자 민치옹(閔致雍)은 남구만(南九萬)의 문인(門人)인데 일찍 죽었고, 그 아들 민용견(閔龍見)은 감역(監役)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동경잡기(東京雜記)』
  • 『송자대전(宋子大全)』
  • 『경세유표(經世遺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명재유고(明齋遺稿)』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백헌집(白軒集)』
  • 『서하집(西河集)』
  • 『명곡집(明谷集)』
  • 『경암유고(敬庵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