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權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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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7년(명종2)∼1624년(인조2) = 78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사열(思悅)이고, 호는 남악(南岳)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권상(權常)의 아들이고,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권황(權愰)의 아우이며 예조 판서권협(權悏)의 형이다. 나운걸(羅云傑)의 외손자이고 이영서(李榮緖)의 사위이다.

선조 중기의 활동

1584년(선조17)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 · 감찰(監察)을 거쳐, 형조 · 호조 · 예조 · 병조의 4조(曹) 낭관(郎官)과 정언(正言) · 지평(持平) 등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25) 종묘서(宗廟署)영(令)이 되었는데, 그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왜적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그는 종묘에 있던 역대 왕들의 신주(神主)와 왕실의 어보(御寶)를 안전하게 행재소(行在所)로 모셨다. 1596년(선조29) 장령(掌令)에 임명되고, 사간(司諫)을 거쳐, 군기시(軍器寺)종부시(宗簿寺)정(正), 헌납(獻納) · 집의(執義)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596년(선조29)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중국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선조 후기의 활동

1597년(선조30)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우승지 · 좌승지를 거쳐서 마침내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다. 1599년(선조32) 병조 참의 · 예조 참의 등을 거쳐서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는데, 진하사(陳賀使)가 되어 중국 북경(北京)을 다녀와서, 병을 핑계로 도승지에서 물러났다. 사림파(士林派)에서 그가 아첨을 잘한다고 비난하였기 때문이다. 1602년(선조35) 대사간에 임명되었을 때 성혼(成渾) 계열의 산림학파(山林學派)가 대두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중국 북경(北京)을 다녀와서, 호조 참판 · 형조 참판 · 예조 참판을 역임하고, 한성부좌윤을 거쳐, 황해도관찰사 · 충청도관찰사와 강화(江華) · 금산(錦山) · 광주(廣州) 3고을의 목민관(牧民官)을 지냈다. 1607년(선조40) 선조는 병이 깊어지자, 그를 다시 도승지로 불러들여 약방(藥房) 부제조(副提調)를 맡겼다. 그는 허준(許浚) 같은 명의(名醫)를 동원하여 선조의 병을 구료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으나, 아무런 보람도 없이 선조는 죽고 말았다. 권희가 선조 후기에 여러 번 도승지를 맡은 데다가 임종 전까지 도승지를 맡았다는 것에서, 그는 선조가 가장 신임하는 도승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인조 시대 원로 우대

1608년(광해군즉위) 광해군은 즉위한 다음 권희를 중추원 동지사에 임명하여 원로대신으로 우대하였다. 1618년(광해군10) 원로 신하로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는 <폐모론(廢母論)>을 주청하는 데에 앞장섰다. 인조도 그를 우대하여 1624년(인조2) 임진왜란 때 종묘의 신주(神主)를 호위한 공로를 포상하여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시켰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장단(長湍) 삼정리(三井里)에 있으며, 정두경(鄭斗卿)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호성(扈聖) 선무(宣武) 원종공신(願從功臣)에 봉해지고,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朝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월사집(月沙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사류재집(四留齋集)』
  • 『우계집(牛溪集)』
  • 『소재집(蘇齋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남파집(南坡集)』
  • 『용주유고(龍洲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