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한(朴泰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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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64년(현종 5)~1697년(숙종 23) = 34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의 문신. 승정원(承政院)정자(正字)를 지냈다. 자는 교백(喬伯)이고,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주거지는 여주(驪州)이다. 아버지는 군수(郡守)박선(朴銑)이며, 어머니 용인 이씨(龍仁李氏)는 형조 참판(參判)이후산(李後山)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를 지낸 문효공(文孝公)박장원(朴長遠)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박훤(朴烜)이다.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권두상(權斗相)의 딸이다. 윤증(尹拯)의 문인이기도 하다.

숙종 시대 활동

1694년(숙종 20)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그 뒤 문한관(文翰官)에 임명되어 새롭게 급제한 인물들을 성균관(成均館)예문관(藝文館), 승문원(承文院), 교서관(校書館) 등 사관(四館)으로 나누어 소속시키는 회자(回刺)의 폐습을 과감히 철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온 지 불과 4년 만에 부모(父母)의 상중이던 1697년(숙종 23) 12월 27일 세상을 떠나니 사류(士流)들이 아까워하며 탄식하였다. 그의 벼슬은 승정원(承政院)정자(正字)에 그쳤다.[『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숙종 23년 12월 27일] 저서로는 그의 시문집을 모은 『박정자유고(朴正字遺稿)』가 있다.

성품과 일화

박태한(朴泰漢)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청렴하고 엄격하며 올바르고 솔직하였는데,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도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충의(忠義)가 분발하여 언제나 나라를 잘 다스리며 백성을 어려움에서 건지는 학설을 저술하였는데, 모두 응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론(黨論) 보기를 자신을 더럽힐 듯이 하여 언제나 사물과 나 그리고 피차(彼此)에 공평하게 여기는 뜻을 두었다. 식견(識見)이 뛰어났으며 언의(言議)가 준엄하고 정직하였다. 같은 때 명망 있는 인사로 이광좌(李光佐)와 최창대(崔昌大) 같은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모두 공경하고 아끼면서 크게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하였다. 선배들 또한 그의 지혜와 사려(思慮)를 칭찬하였다.[『숙종실록보궐정』숙종 23년 12월 27일]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명재유고(明齋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