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한관(文翰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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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에 교서(敎書)나 외교 문서 등 문장의 작성을 담당했던 관원.

개설

문한관(文翰官)은 정해진 관직명이라기보다 일종의 직능을 말한다. 좁은 의미에서는 문장이 뛰어나 사대교린 문서 작성에 장점이 있는 관원, 왕의 교서 작성에 장점이 있는 관원을 가리킨다. 넓게는 경연과 같은 학문 연구를 담당하는 홍문관 관원이나 역사 기록을 담당하는 춘추관의 사관도 문한관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이런 데에는 이들이 소속된 관청이 밀접히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려시대에는 문한관과 사관을 합하여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이라 하였다. 또한 조선초기인 1420년(세종 2)에 집현전이 설치되기 전까지 예문관은 참상관 이상의 문한관, 참하관인 사관의 관청이었고 이들은 한 관청에 소속되어 있었다.

집현전의 설립과 『경국대전』의 완성을 기점으로 문한관은 홍문관·예문관의 참상관을 주로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정조가 규장각에 각신(閣臣)을 둔 뒤에는 규장각 각신도 문한관의 범주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문한관은 관청의 변화와 상관없이 국가에서 필요한 기능으로써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담당 직무

문한관의 일차적 기능은 실무적 능력이다. 이는 문장을 잘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 등에 보낼 외교 문서의 작성, 왕의 전교나 책문 등을 작성하는 데 필요한 능력이 그것이다. 이 때문에 고려시대부터 이미 원봉성(元鳳省)을 설치하여 왕 대신 글을 짓고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제찬(制撰)과 사명(詞命)을 관장하게 하였다. 원봉성은 뒤에 학사원(學士院)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현종대에 한림원(翰林院)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충선왕 복위년인 1308년에는 문한관과 사관을 합하여 예문춘추관이라 하였다. 이것이 문한(文翰)의 범주에 문한관과 사관이 함께 들어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문장을 잘 쓴다는 첫 번째 기능의 담당자는 주로 예문관 관원이었다. 『경국대전』「예문관」 규정에 나오는 영사(領事)·대제학(大提學)·제학(提學)·직제학(直提學)·응교(應敎)가 그들이었다. 예문관은 이원적 구조로 되어 있었다. 영사·대제학·제학·직제학·응교는 모두 겸관이었고 녹관(祿官)봉교(奉敎)·대교(待敎)·검열(檢閱) 등 참하관은 사관의 역할을 띠고 있었다. 영사 이하의 예문관 겸관들이 왕의 명령이나 글을 대신 짓는 제찬사명(制撰辭命)의 예문관 임무를 담당하였다. 사명(辭命)에는 왕의 교서나 책문, 각종 외교 문서 등이 포함된다. 이 사명을 담당하는 관원은 특별히 지제교(知製敎)라 하여 문장에 뛰어난 관원이 맡았다.

문한관의 두 번째 기능은 학문 연구와 강론이다. 1407년(태종 7) 사간원에서 올린 상소를 보면, 문한의 직임을 ‘경사(經史)의 학문을 권장하고 무너진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기틀’로 이해하고 있다. 당시에는 새롭게 조선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정책은 물론, 경제·문화 전반의 발달을 위해 필요한 인프라를 만들어나갈 기초 조사와 함께 대안·방향 등을 제시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같은 문한관이라고 해도 고려와 조선의 문한관에는 차이가 있었다. 중국 한나라 때의 유학 정치 제도와 조선·송나라의 유학 정치 제도가 같을 수는 없듯이, 경연이나 사관 같은 문한 관청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남종선(南宗禪) 계통의 불교가 주도 이념이었던 고려와, 신유학을 지향했던 조선에서 문한관이 했던 역할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법회(法會)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해결하던 사회에서 경연이 했던 역할과, 처음부터 성학론(聖學論)에 입각하여 수기(修己)·치인(治人)을 논하는 자리로 경연을 생각하던 사람들이 이끄는 경연이 같을 수는 없었다. 윤회와 해탈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가진 시간관과, 현실 사회를 중심으로 존재의 생멸을 생각했던 사람들이 가졌던 역사관이 같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국가 운영 방향을 잡아나가던 조선초기에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을 함께 공부하여 치도(治道)의 근본을 탐구할 목적으로 설치된 경연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경연을 맡았던 집현전이 다양한 학문 연구, 편찬 사업, 정책 논의, 언론 활동을 통하여 『치평요람(治平要覽)』,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고려사』를 비롯하여 『효행록(孝行錄)』, 『삼강행실(三綱行實)』 등 조선과 중국의 서적을 편찬·주석하고, 훈민정음 창제를 주도했던 것도 당연하였다.

변천

왕 대신 글을 짓고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제찬과 사명을 관장하게 하기 위하여 고려시대부터 원봉성을 설치하였다. 나중에 원봉성은 학사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현종대에는 한림원으로 개칭하였다. 1308년에는 문한관과 사관을 합하여 예문춘추관이라 하였다.

조선에서는 1392년(태조 1)에 예문춘추관을 이어 예문관을 두었고, 1401년에 관제가 개편되면서 예문관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예문관의 문한 기능은 세종대에 집현전이 설립되면서 상당 부분 집현전에 통합되어 다양한 학문적 성과를 냈다. 그러나 1456년(세조 2)에 집현전이 폐지되면서 문한 기능은 퇴락했다. 집현전을 폐지한 뒤 집현전에서 보관하던 장서들을 예문관으로 옮겼으며, 1462년(세조 8)에는 겸예문관직(兼藝文館職)이 설치되어 집현전의 일부 업무를 대신하였다. 그러나 전원이 겸직이었기 때문에 형식적인 활동에 그쳤다.

1478년(성종 9)에 이르러 홍문관(弘文館)이 집현전을 대신하는 명실상부한 문한 기구의 대표적인 관서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홍문관은 1463년(세조 9)에 도서관 기능을 담당하는 관서로 설립되었던 기관이었다.

사림(士林)이 본격적으로 정치를 주도했던 조선중기 이후로 단순히 문장에 뛰어나다는 이유로 문한관에 임명되지는 않았다. 이미 집현전이 경연을 담당할 때부터 예견되었던 것이지만, 이제는 무엇보다 학문과 덕성을 갖춘 인물이 중시되었다. 수신(修身)을 통해 치국(治國)의 경륜을 갖춘 사회적인 사표(師表)가 될 인물이어야 문한관으로서 자격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홍문관지(弘文館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오항녕,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일지사, 2009.
  • 오항녕, 「조선초기 문한관서의 정비와 사관제도」, 『한국사학보』 7, 1999.
  • 최승희, 「집현전 연구 상: 치폐시말과 기능 분석」, 『역사학보』 32, 1966.
  • 최승희, 「집현전 연구 하: 치폐시말과 기능 분석」, 『역사학보』 33, 1967.
  • 최승희, 「홍문관의 성립 경위」, 『한국사연구』 5, 1970.
  • 최승희, 「홍문록고」, 『대구사학』 15·16,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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