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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2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군량을 비축해 두기 위하여 군·영문에 지급한 토지나, 개간 및 절수를 통해 군·영문에서 자체적으로 확보한 둔전.

개설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군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할뿐더러 새로 군영(軍營)을 창설하게 되면서 군사 재원을 확충해야 하는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수요를 해소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군·영문으로 하여금 독자적으로 둔전(屯田)을 확보하여 재원에 활용하도록 하였다. 군·영문은 우세한 물력과 노동력을 바탕으로 개간과 절수를 통하여 둔전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둔전을 경작하는 민인들의 지속적인 저항과 수취 체제를 집권화하려는 정부의 노력으로 인해 둔전의 지배-수취 구조가 변동하는 가운데 군·영문의 직접적인 둔전 경영은 점차 유명무실해졌다.


내용 및 특징

군·영문에서는 감관(監官)을 파견하여 둔전을 관리·경영하였다. 감관은 일반적으로 각 기관에 속한 직원·장교들로 임명되었다(『선조실록』 33년 7월 25일). 한편 둔전을 직접 경작하는 이들을 둔민(屯民)·둔군(屯軍)이라 불렀다. 둔군은 군영의 예속 노동력으로서 영(營)에 소속된 각종 직역자였다. 반면 둔민은 일반 민인으로서 부역 징발이나 유민(流民)을 모집하는 방식으로 확보된 노동력이었다. 그 밖에 민간에 병작(竝作)의 방식으로 둔전을 경작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둔전의 소유 구조는 군·영문이 소유권을 가진 ‘유토둔전(有土屯田)’과, 민전지주에게 수조권을 행사하는 ‘민결면세지(民結免稅地)’로 구성되었다. 둔전의 수취액은 유토둔전의 경우 결당(結當) 조(租) 200두(斗) 혹은 조 100두였다. 한편 민결면세지의 경우는 결당 미(米) 23두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유 구조 및 수취 방식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고 다양한 현실적 조건 속에서 변화되었다.

연원 및 변천

둔전은 원래 교통·운송이 발달하지 않은 중세사회에서 국방상의 요충지에 주둔하는 군사로 하여금 황무지(荒蕪地)나 진전(陳田) 등을 개간·경작케 하여 군수(軍需)에 충당하는 이른바 차전차경(且田且耕)의 군사목적용 특수지목이었다. 조선전기에는 고려말의 여러 둔전 문제를 정리하고 국둔전(國屯田)관둔전(官屯田)을 통하여 점차 둔전제가 정비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국둔전·관둔전은 누차에 걸쳐 설치와 폐지를 반복하였고, 그 경작은 대부분 군인 등의 부역 징발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나마도 16세기에 들어서면 양반 토호층의 사적 점탈로 둔전제는 쇠퇴일로에 놓여 있었다.

조선왕조의 둔전제는 양란(兩亂)으로 다시 확대되었다. 정부는 전란을 맞아 군량 조달을 위하여 둔전을 장려하였다. 이때 주가 되었던 것은 영둔토(營屯土), 즉 군영문 둔전(軍營門 屯田)이었다. 각 지역의 여러 군영에서는 정부의 재정 지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개간과 기경(起耕)에 적극적이었다.

1629년(인조 7)의 기사를 보면, 통영(統營)의 둔전은 부족한 군량을 보충하기 위해서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인조실록』 7년 9월 26일). 이때의 둔전 경영 형태는 군영에 예속된 직역자를 통한 부역제적 경영과, 유민(流民)의 모집을 통한 모민설둔(募民設屯)의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인구 증가 및 개간의 진전에 따라 무주진황지(無主陳荒地)의 확보가 점차 어려워졌다. 이에 점차 이전까지는 무주진황지를 대상으로 시행되던 둔전 절수(折受)는 사실상 농민의 실제 소유지인 개간지를 침탈하는 한편, 면세·면역의 특권으로 투탁(投託)을 유도하는 방법이 증가하게 되었다. 숙종대는 이미 여러 감영(監營)·병영(兵營)에서 이러한 방식을 통한 둔전의 설치가 활발해졌다.

한편 17세기 후반부터 각종 신역을 노동력이 아닌 현물로 지급하는 물납화(物納化)가 진행됨에 따라 부역제에 입각한 둔전 운영은 일반 민인에게 병작을 주어 경영하는 병작제 방식으로 변화되었다. 부역제적 둔전이 해체되면서 지방의 토호나 재력가들의 불법 점유 행위가 증가하였다. 이에 각 영(營)은 군졸·유민에 의한 불안정한 경영 대신 토지에 대한 법적인 소유권을 유지하면서 이들 토호·지주에게 둔전의 경영을 맡긴 채 효율적인 수취를 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였다.

동시에 숙종대부터 시작된 양역변통논의(良役變通論議)가 진전됨에 따라 둔군(屯軍)의 정액이 결정되었고, 각 군영의 둔전에 대해서도 면세 결수를 확정하여 더 이상의 확장을 막으려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또한 조정에서는 둔전에서의 수취를 수령이 담당하게 하여 군·영문의 둔전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배제하려 하였다. 이에 각 군문은 군문 장교를 별장에 임명하여 수령의 침탈을 막고 둔전·둔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중엽이 되면 향촌 사회의 내부에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한 둔민들이 오랜 기간 경작하면서 형성된 사실상의 소유권을 근거로 지대 인하를 주장하고 나섰다. 결국 군·영문은 수취 총액을 정하고 농사의 풍흉에 관계없이 그 액수를 거두는 정총제(定摠制)를 채택하였다. 이후 군·영문의 주된 관심사는 정총의 확보에 그치게 되었고 실제 운영은 사실상 각 읍에 위임되었다. 결국 19세기 둔전의 수취는 면리조직(面里組織)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군·영문의 직접적인 둔전 경영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송양섭, 『조선후기 둔전 연구』, 경인문화사, 2006.
  • 송양섭, 「17세기 軍營門屯田의 擴大와 경영형태의 변화」,『역사와 현실』 36, 한국사연구회, 2000.
  • 이경식, 「조선초기 둔전의 설치와 경영」,『한국사연구』 21·22, 서울대학교,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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