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민(屯民)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주로 둔전 경작에 종사하는 작인(作人)을 지칭하지만, 국가의 입장에서는 둔전 내부의 지주적 존재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음.

개설

둔전 경작의 노동은 군졸·승군(僧軍)·목자(牧子) 등 직역자와 유민(流民)이나 이에 상응하는 부류가 담당하였다. 둔전 경영은 부역제적 방식에 입각해 있었고 농민의 자율적 영농과는 거리가 있었다. 17세기 둔전의 상당수가 경영의 불안정과 낮은 생산성을 드러낸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로써 둔전 경영에 병작제(竝作制)가 채용될 수밖에 없었다. 병작제 하의 둔민들은 둔전 내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지주층(地主層)과 경작을 담당하는 작인층(作人層)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둔토 내의 실질적인 지주로서 작인과 토지를 장악하고 군아문과 지속적인 길항 관계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둔민의 대다수는 이들 중답주 등과 일정한 대립 관계에 있으면서 경작을 담당하던 직접생산자로서의 둔전 경작민이었다. 이들 둔민은 군·아문에 갖가지 형태로 저항하였는데 그것은 주로 수취액의 인하를 주장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둔민의 궁극적인 의도는 단순히 수취액의 인하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둔전에 대한 내적 지배력을 어느 정도 구축한 상황에서 이를 법적으로 추인받아, 토지를 명실상부한 자신들의 소유지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담당 직무와 변천

둔전민의 존재 형태는 둔전의 경영 형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왜란·호란을 거치면서 조선 정부는 재정 확보는 물론 황무지를 개간하고 유민을 정착시키는 적절한 방법으로 둔전 설치를 추진하였다. 전쟁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17세기 전반은 광범위한 무주진황지(無主陳荒地)와 유민의 존재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둔전의 경영도 두 가지 부류의 노동력을 염두에 두고 추진되었다. 그 하나가 군졸·승군·목자 등 예속노동력을 이용한 경영 방식이었다. 이들 예속노동력은 신역의 일환으로 둔전 경작에 투입되었다.

둔전 경영의 또 다른 형태는 유민이나 이에 상응하는 부류였다. 이들은 군량·재정의 확보와 유민의 안집이라는 두 가지 목적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형태로 간주되었다. 정부는 둔전을 통하여 국가의 파악에서 벗어나 각종 공적 부담에서 제외되고 있었던 유민적 계층을 확보하여 자립도를 제고시킨 후 국역편제에 흡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숙종실록』 즉위년 11월 5일).

둔전 경영은 본질적으로 부역제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 만큼 자율적인 영농과는 거리가 멀었고, 이는 곧바로 생산성 저조로 이어졌다. 17세기 둔전의 상당수가 경영의 불안정과 낮은 생산성을 드러낸 것은 이 때문이었다. 결국 둔전 경영 방식은 점차 토지를 일반 백성에게 주어 병작(竝作)케 하는 형태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둔전에서의 병작제의 확산은 17세기 농업 변동의 전반적인 추세를 반영한 것이었다. 부역제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던 둔전 경영을 낡은 것으로 만들면서 그 인신적 지배예속 관계를 탈피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병작제 하의 둔민들은 둔전 내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지주층과 경작을 담당하는 작인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둔토 내의 실질적인 지주로서 작인과 토지를 장악하고 군아문과 지속적인 길항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중답주(中畓主)·기주(起主)·도장(導掌) 등으로 나타나며, 개간·출자·투탁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성립되었다. 이들은 군·아문과 함께 작인들로부터 지대를 분취(分取)하고, 마름이나 둔장(屯長) 등의 직임을 차지하여 둔전관리에 공식적으로 둔전을 관리하는 데 간여하였다. 이들이 존재하는 둔전은 ‘군아문-중답주-전호’의 중층적 소유 구조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둔민의 대다수는 직접생산자인 둔전 경작민이었다. 둔전 경작민은 대단히 영세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이들의 부담이 과중한 데 있었다. 둔전 경작민은 정해진 지대를 납부하는 것 이외에 각종 부담을 감수해야 하였고 규정 외의 자의적 수탈에도 노출되어 있었다(『순조실록』 11년 3월 30일). 각종 토지세는 물론 환곡의 부담도 이들의 삶을 위협하였다. 또한 이들은 종자나 수세(水稅)·둔우(屯牛) 등 둔전 경영과 관련된 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해야 했다. 이는 임진왜란기나 17세기 전반의 둔전이 종자·농우 등 생산 도구 일체를 국가나 해당 기관에서 마련하는 것이 원칙이었던 점과 비견된다.

한편 둔민은 수취액을 낮추기 위해 갖가지 형태로 저항하였다. 수취액의 기준은 민전 수준의 결세액인 조 100두나 미 23두였다. 둔민의 궁극적인 의도는 단순한 수취액 인하가 아니었다. 둔전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을 구축하여 이를 법적으로 인정받고, 결국에는 그 토지를 명실상부한 자신들의 소유지로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군·아문의 입장에서는 이 같은 둔민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수취량이 저하되어 결세 수준으로 하향 조정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군·아문에 대하여 끊임없이 항조(抗租)하는 자들은 대부분 향촌사회의 내부에 재지적 기반을 갖춘 지주층들이었다(『정조실록』 17년 10월 23일). 이들이 작인들의 고통을 호소하는 것도 그 실상은 자신들을 실질적인 토지의 소유주로 자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문과 관아의 과중한 수탈이 농업경영에 곤란함을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당시 둔전제가 이는 당시 둔전제가 점차 명목적인 소유 관계를 파기하면서, 수취나 소유 구조면에서 일반 민전과 동일한 형태로 변해 가는 과정이었음을 보여 주었다. 이 같은 둔민의 저항은 지대의 점진적 저하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군문과 관아의 둔전에 대한 지배력의 약화는 둔전 결수(結數)의 감축으로 이어졌다. 더구나 둔전에 대한 수취권을 수령이 장악한 경우 그 정도는 더욱 심하였다. 둔전의 결수 감축은 향촌 내의 재지 세력과 수령·아전 등의 상호결탁 하에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참고문헌

  • 송양섭, 『조선후기 둔전연구』, 경인문화사,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