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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9 기준 최신판



국왕, 중앙관료, 수령 등이 안정적인 농업생산을 위해 농민들에게 농사를 권장하고 장려하는 여러 가지 활동.

개설

조선시대에 권농은 농민들에게 농사를 권장하고 장려하기 위하여 국왕과 관료, 지방 수령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먼저 농사가 나랏일의 근본이라는 점을 크게 강조하였다. 조선초기에 세종은 권농교문(勸農敎文)에서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농사짓는 일은 의식(衣食)의 근원이고, 왕정(王政)에서 먼저 해야 할 바이다”라고 규정하면서 나라와 백성과 농사짓는 일은 삼위일체적인 것임을 분명하게 표명하였다. 조선사회에서 농사짓는 일은 백성과 나라의 존립을 근저에서부터 보장해주는 토대로서 모든 구성원이 최우선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에 권농은 필수적인 사업이었다. 즉, 농본(農本)을 내세운 조선사회에서 권농은 농정책의 기반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권농을 일차적으로 수행한 것은 바로 국왕이었다. 역대 조선왕조의 국왕은 농사의 권장을 강조하여, 각종 왕명(王命)을 내렸다. 특히 조선후기 숙종대 이후에는 권농교(勸農敎), 또는 권농윤음(勸農綸音)을 매년 연초에 반포하는 것이 상례화되었다. 그리고 농사짓는 일을 중시하는 것은 지방에 파견된 수령, 목민관(牧民官)의 필수적인 자질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또한 중앙 관료들도 농본을 늘 염두에 두고 권농 방안을 마련하는 데 몰두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왕조가 추진한 권농(勸農)은 말 그대로 ‘농사의 권장’이지만, 이를 좀 더 풀이하면 ‘농사의 권장과 장려’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농본(農本)을 원리적으로 표방하는 것이었는데, 농사의 권장, 즉 가장 일차적인 권농이었다. 다른 하나는 농사 권장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면서 이를 현실화시키게 만드는 여건의 조성 즉 농업 장려였다. 전자는 외면으로 보면 국왕이나 신하들의 농본 의식 고취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모든 통치의 전반적인 측면에서 관철되는 것이었다. 특히 목민관(牧民官)인 수령(守令)과 감사(監司)에게 농상(農桑)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표출되었다. 후자는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으로 제언(堤堰) 등 수리시설 축조, 농서(農書) 편찬과 활용, 새로운 품종 보급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왕조는 특별히 권농을 전담하는 관서(官署)를 설치하지 않았다. 사실 그러한 관서를 설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호조, 의정부를 포함한 수많은 관청들이 농정에 관련된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과정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권농의 특정한 측면을 전담하여 담당하는 아문이 있었는데, 바로 전농시(典農寺)였다. 전농시는 동서 적전(籍田)의 관리를 담당하였는데, 평상시 주변 농민을 동원하여 경작하게 하였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 여러 가지 곡물을 시험 재배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중앙정치 기구로 권농을 관장하는 관청이 없었지만, 사실 조선초기 농정책 수행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바로 지방통치체제의 골간을 형성하고 있던 감사와 수령이었다. 조선왕조는 지방지배체제를 강력하게 구축하면서 농업문제를 ‘농상(農桑)은 왕정의 근본이며, 학교는 풍화(風化)의 원천(源泉)이라’고 하듯이 통치의 근본으로 인식하였다. 특히 중앙집권체제를 강화시켜 농정책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지방관이 해야 할 일로 ‘농상의 권장’이 크게 강조되었다. 농상의 권장을 통해 농업 생산을 증대시키고, 이를 통해 국가체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해나가려는 것이었다.

변천

조선초기 수령의 권농활동은 실제로 국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는 사조(辭朝)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세종을 비롯한 조선의 국왕은 사조하는 수령과 감사를 불러보는 자리에서 ‘농상에 힘쓰고, 환자[還上]를 제대로 하라’고 당부하는 일을 잊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수령은 이 자리에서 ‘농상성(農桑盛)’이라는 과제를 가슴에 담지는 못할지언정 머릿속에서 떠나보내서는 안 된다는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다.

지방 수령은 경종(耕種)과 제초(除草) 그리고 수확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농시(農時)를 맞이하게 될 때 농사 현장에 가까이 지내면서 이를 장려하거나 독려하고, 나아가 농민을 어루만지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따라서 수령을 적당한 인물로 채워야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에 이러한 적임자 선발을 득인(得人)이라고 하였다. 수령이 근실하면 권농이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백성이 혜택을 받아 충분히 살아나갈 수 있었다. 따라서 우선 적임자를 수령에 임명해야 했고, 계속해서 수령의 근만(勤慢)을 파악하기 위해 조관(朝官)을 보내어 감독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외방의 수령은 권농책을 수행하면서 자신을 보좌하는 권농·권농관과 감고(監考) 등의 하급 관원을 임명하였다. 권농관으로 통칭되는 이들이야말로 현실적으로 가장 농민의 농사일에 밀착해서 농정을 수행하는 관리들이었다. 본래 농무(農務)를 감독하는 것은 권농(관)에게 맡겨진 것이었지만, 수령은 따로 감고를 차정(差定)하여 이들에게 여러 가지 일을 위임하기도 하였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수령은 권농과 감고를 차정할 때 가능하면 성실하고 유식한 인물을 선택하도록 종용받았다.

농사철에 수령은 권농을 임시로 차정하여 파종과 제초를 독려하는 임무 즉 감농의 책무를 맡기기도 하였다. 이때 너무 각박하게 농민들을 몰아세워서 폐해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각관(各官)의 감고는 구황의 실행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구황을 온전히 잘 수행하여 기민(飢民)이 죽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되면 시상을 받았다. 각 고을에 설치된 진제장(賑濟場)에서도 감고는 색리(色吏)와 더불어 기민 구휼을 맡아서 수행하였다. 물론 일을 잘못 처리할 경우에는 처벌도 뒤따랐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이들은 외부적으로는 권농의 직임을 띤 것으로 표현되었지만 감농, 황정 등을 겸하여 수행하였다.

수리시설로 제언을 쌓는 것은 권농 차원일 뿐만 아니라 흉년을 대비하는 계책이기도 하였다. 수령에게 제언을 축조하도록 독려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당시에도 제언(堤堰) 내의 경작가능지를 모경(冒耕)하기 위하여 제방을 헐어내어 저수(貯水)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례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수리(水利)의 효과를 상실시키는 이러한 모경(冒耕) 행위를 엄중히 처벌하려고 하였다. 또한 제방이 상실된 제언을 새롭게 보수(補修)하여 수리의 효과를 거둘 수 있게 하였다.

수리시설과 더불어 농업을 장려하기 위한 여건을 마련하는 데 요긴한 것이 농우(農牛)의 확보였다. 기경(起耕)에 동원되는 우력(牛力)을 인력(人力)을 대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소의 존재가 기경작업 등 축력을 이용하는 농기구의 활용에 관건이 되었기 때문에 국가적인 관심사의 하나가 소의 사육과 번식 문제였다. 소를 사육하고 번식하는 방책이 제대로 수행되려면 소를 도살하는 것을 막는 금령도 동시에 추진되어야 했다. 이른바 우금(牛禁)이라는 금제(禁制)는 조선시대 대부분의 국왕의 강조 사항이었다.

조선시대 중앙정부가 수행한 권농정책의 한 방향은 개간(開墾)을 권장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개간의 장려를 위해 역대 조정이 마련한 여러 가지 시책을 계승하여 수령에게 개간을 독려하고, 나아가 개간자에게 시상을 하기도 하였다. 중농 하는 정사에서 개간을 권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간주하고 있었다.

세종대 권농의 일환으로 수행된 것이, 농업 장려 나아가 농법의 정리와 보급을 위한 농서(農書) 편찬이었다. 태종대 이전은 물론이고 세종대 이후에도 고려말 합천(陜川)에서 복각(復刻)한 『농상집요(農桑輯要)』를 실제 권농에 활용하였다. 그러다가 1429년(세종 11) 하삼도 지방의 농업기술을 정리한 『농사직설(農事直說)』이 편찬되었다. 『농사직설』의 편찬은 당시 하삼도 지역의 가장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평안·함경 지역에 보급시키고, 경기·강원도 지역의 농업기술상의 격차를 극복하려는 목표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세종은 1437년(세종 19) 7월에 제도(諸道) 감사에게 전지(傳旨)하여 『농사직설』의 내용을 농민들에게 잘 일깨워 주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세종은 그동안 『농사직설』을 권장하는 데 미흡하였음을 지적하고 새로 인쇄한 것을 각 군현에 보내어 농민을 가르치고 권해야 함을 강조하였다.(『세종실록』 19년 7월 23일)

의의

조선왕조의 권농은 농민의 재생산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가적인 차원에서 진행된 주요한 정책활동이었다. 국왕, 중앙관료, 수령들은 농사를 권장하고 장려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 이를 시행에 옮겼다. 제언과 천방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게 하고, 진황지의 개간을 장려하였으며, 농서를 편찬하여 보급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는 권농의 실행을 통해 농업생산의 안정성을 높였고, 이를 통해 전세를 수취하고, 농업경제를 발달시킬 토대를 마련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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