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사도(碧沙道)"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2:2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벽사도 |
한글표제 | 벽사도 |
한자표제 | 碧沙道 |
하위어 | 벽산역(碧山驛), 영보역(永保驛), 별진역(別珍驛), 가신역(嘉新驛), 파청역(波淸驛), 낙신역(樂新驛), 낙승역(洛昇驛), 양강역(楊江驛), 녹산역(綠山驛), 파청역(波靑驛), 진원역(鎭原驛), 통로역(通路驛), 남리역(南利驛), 낙승역(樂昇驛) |
관련어 | 역도(驛道), 승나주도(昇羅州道), 역리(驛吏), 역노(驛奴), 역비(驛婢), 찰방(察訪), 역승(驛丞) |
분야 | 경제/교통/육운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朝鮮) |
집필자 | 조병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벽사도(碧沙道) |
조선시대에 호남의 보성·흥양·낙안·강진·영암·해남 등지에 설치된 역을 총괄한 역도.
개설
벽사도(碧沙道)는 조선시대 호남 지방에 편성된 역도(驛道) 중 하나로, 고려시대의 승나주도(昇羅州道)에 소속된 벽산역(碧山驛)·영보역(永保驛)·별진역(別珍驛)·가신역(嘉新驛)·파청역(波淸驛)·낙신역(樂新驛) 등이 조선전기 세종 연간에 하나의 역도로 편성되면서 성립하였다. 벽사도는 세종 때부터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반포된 성종 무렵까지는 역승(驛丞)이 관할하였으나, 1535년(중종 30)부터는 종6품 찰방(察訪)이 파견되어 역무를 감독하였다.
내용 및 특징
벽사도는 고려시대의 승나주도에서 비롯되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벽사역(碧沙驛)을 비롯해 파청역·낙신역·영보역·별진역·통로역·진원역·녹산역·양강역·가신역 등 10개의 속역으로 편성되었다. 그 뒤 1462년(세조 8) 8월에 병조의 건의에 따라 역도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벽사역·진원역·통로역·별진역·녹산역·가신역·파청역·양강역·남리역·낙승역 등 10개 역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낙안의 낙신역(樂新驛)이 낙승역(洛昇驛)으로 바뀌고, 양강역이 양강역(楊江驛)으로, 녹산역이 녹산역(綠山驛)으로 표기가 바뀌고, 영암의 영보역이 청암도(靑巖道)로 이속되어, 『경국대전』에는 벽사역·가신역·파청역(波靑驛, 波淸驛)·양강역·낙승역·진원역·통로역·녹산역·별진역·남리역 등 10개 역으로 재구성되었다. 이와 같은 벽사도의 속역은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벽사도속십역지(碧沙道屬十驛誌)』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어, 조선후기까지 이 편제가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벽사도는 이후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한편, 벽사도의 역민 구성은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다음 <표1>과 같이, 역리(驛吏) 592명, 역노(驛奴) 1,910명, 역비(驛婢) 111명이 배속되어 역무를 담당하였다. 한편, 1895년(고종 32)에 편찬된 『벽사도역지(碧沙道驛誌)』에 따르면, 벽사도의 본역인 벽사역의 경우 아전 15명, 통인(通引) 10명, 공차(工差) 9명, 서자(書者) 12명, 관노(官奴) 8명, 사령(使令) 17명, 방자(房子) 4명, 비자(婢子) 3명, 채한(菜漢) 2명, 급주(急走) 5명, 보종(步從) 6명, 마호(馬戶) 14명, 구종(驅從) 8명 등이 업무를 맡아보았으며, 벽사도 속역 전체에는 마호 88명, 서자 6명, 보종 74명과 역마 88필이 배속되어 있었다.
또한 벽사역의 역사 건물은 찰방이 집무를 보는 동헌(東軒) 3칸을 비롯해 연당(蓮堂) 3칸, 내아(內衙) 5칸, 관덕정(觀德亭) 3칸, 공수(公需) 3칸, 규양문(葵陽門) 2칸, 호고(戶庫) 3칸, 진고(賑庫) 2칸, 화고(禾庫) 2칸, 측문(厠門) 1칸, 마구(馬廐) 1칸, 급창방(及唱房) 1칸, 누상고(樓上庫) 3칸, 덕류문(德流門) 1칸, 사령방(使令房) 5칸, 작청(作廳) 19칸, 공고(工庫) 3칸, 통인청(通引廳) 5칸, 외관(外舘) 21칸, 관노청(官奴廳) 4칸, 사령청(使令廳) 4칸 등이 <그림1>과 같이 배치되어 있었다.
변천
고려시대의 승나주도에 속한 벽산역이 조선전기 세종 연간에 벽사역으로 개칭된 것으로 보이는데, 벽사도는 이 벽사역을 비롯해 새로 설치된 강진의 진원역과 통로역, 보성의 양강역 등을 속역으로 편성되었다. 그 뒤 해남의 남리역이 추가되고, 영암의 영보역이 청암도로 이속되면서 확립되었다. 이후 『경국대전』 체제에 이르러 완성된 벽사도는 <표2>에서 보듯이, 커다란 변화 없이 조선후기까지 존속하였다. 한양과 전라도 남부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 역할을 한 벽사도는 갑오개혁이 마무리되는 시점인 1896년 1월에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 『해동지도(海東地圖)』
- 『조선후기지방지도(朝鮮後期地方地圖)』
- 『동여도(東輿圖)』
- 『경양역지(景陽驛誌)』
- 조병로, 『한국근세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조병로, 「조선후기 호남지방의 역제운영에 관한 일고찰」, 『경기사론』2, 199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