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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19 기준 최신판



군졸을 경제적으로 돕는 사람 또는 정군과 보인을 합해 부르는 말.

개설

조선시대 군역을 부담하는 형태는 직접 군졸로 복무하는 호수(戶首)와 그 호수에게 쌀이나 베를 주어 호수가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는 봉족(奉足)으로 나뉘었다. 봉족은 1464년(세조 10) 보법(保法)이 시행된 후로 봉족 2명을 1보(保)라 하여 ‘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세조실록』 10년 2월 14일). 조선후기에는 군졸로 복무하는 1명을 정군(正軍)이라 하고, 군졸로 복무하지 않는 대신에 쌀이나 베, 돈을 내어 군역의 의무를 담당하는 양인 신분의 장정을 보인(保人)이라 불렀다.

내용 및 특징

호수 1명에게 지급되는 봉족의 숫자는 호수의 역이 얼마나 고된가, 얼마나 많은 군사 물품을 갖추어야 하는 역인가, 때로는 호수의 신분과 지위가 얼마나 높은가에 따라 적으면 1명에서 많으면 5명에 이르렀다.

처음 봉족제를 시행할 때에는 호수가 직접 봉족에게 봉족가(奉足價)를 거두게 하였다. 이때 호수가 역을 담당하는 동안 받는 봉족가는 한 달에 면포 1필을 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호수가 봉족에게 규정 외의 과도한 봉족가를 받아 내서 종종 문제가 되었다. 이는 보법 시행 이후 보인에게 보포(保布)를 거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과도한 부담을 견디지 못한 봉족이나 보인은 도망쳤다. 봉족이나 보인 없이 홀로 군역을 부담해야 할 정군도 군역을 감당하기 어려워 잇달아 도망치는 일이 잦아졌다.

정군은 생업을 버려두고 서울까지 오르내리며 군역을 져야 했기 때문에 정군으로 입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15세기 후반부터는 정군이 직접 입역하지 않고 사람을 사서 대신 입역하게 하는 대립(代立)이 성행하였다. 15세기 말 성종 때에는 대립하는 금액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책정하여, 정군의 대립을 인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성종실록』 8년 윤2월 11일). 그리고 16세기 전반 중종 때에는 대립 금액을 관에서 직접 징수하여 대립인에게 지급하였다.

한편 지방에서는 이미 15세기 중엽 세종 때부터 방군수포(放軍收布)가 횡행했다. 방군수포는 본래 병영·수영, 진에서 입역해야 할 군사들에게 사정이 있는 경우 포를 받고 그것으로 다른 군사를 고용하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포의 일부를 첨사(僉使)·만호(萬戶)들이 사사로이 착복하고 일부만 가지고 군사를 고용해서 문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보인도 정군에게 직접 포를 주지 않고 관에 바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 정군과 보인의 직접적인 관계는 단절되었고, 군역 가운데 일부 정군의 역은 보인과 마찬가지로 군포를 내는 역으로 변질되어 갔다.

변천

15세기 후반부터 대립(代立)의 성행으로 군역제가 변질되었고 방군수포의 폐단으로 군사 편제는 허술해졌다. 이런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인 17세기에는 기존 군제[舊軍制]의 군보를 채우려는 노력과 신설한 오군영(五軍營)의 군보를 채우려는 노력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 결과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군사와 보인의 숫자는 50만명 내지 60만명에 이르렀다. 이 숫자는 어느 정도 기복은 있었으나 큰 변화 없이 균역법 시행기를 거쳐 조선말기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군보 총수를 엄격히 관리하기 위해 균역법이 시행되기 직전인 1748년(영조 24)에는 『양역실총(良役實摠)』이 간행되었다(『영조실록』 24년 6월 20일). 이때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6도의 군보 총수는 서울의 오군영·병조·수군 등에 소속된 경안부(京案付) 양역이 약 47만4000명, 지방의 감영·병영 등에 소속된 외안부(外案付)양역이 10만4000명으로 모두 57만8000명가량이 되었다. 그리고 평안도의 경우 1759년(영조 35)에 조사한 결과로는 128,000명의 군보가 『관서양역실총(關西良役實摠)』에 등재되었다.

일반적으로 보인의 부담은 양정 1명당 연간 베 혹은 무명 2필이었으며, 군역의 성격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병조 기보병(騎步兵)의 보인은 16개월에 2필, 초기 훈련도감 포보(砲保)수군(水軍)은 연간 3필을 내야 했다. 그러나 18세기에는 2필로 통일되었다. 물론 중앙정부의 허락 없이 이보다 헐한 부담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사모속(私募屬)은 1필이나 그 이하의 것도 많았다.

보인들이 내는 군포는 이전에는 약간 거친 35척짜리 베를 1필로 징수하였으나, 1704년(숙종 30)부터는 더 고운 40척짜리 베를 1필로 징수하였다(『숙종실록』 30년 12월 28일). 따라서 돈으로 낼 경우 5냥이었던 것이 6냥으로 올랐다. 이를 쌀로 환산하면, 시기와 지역에 따라 기복이 심하였으나 공정 가격은 12말[斗]이었다.

참고문헌

  •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편, 『한국군제사: 근세조선전기편』, 육군본부, 1968.
  •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 편,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한울, 1990.
  • 김석형, 「이조초기 국역편성의 기저」, 『진단학보 』14, 1941.
  • 이재룡, 「봉족에 대하여-조선초기 군역제도를 중심으로-」, 『역사학연구』 2, 1964.
  • 정연식, 「17·18세기 양역균일화정책의 추이」, 『한국사론』 13, 1985.
  • 지두환, 「조선전기 군역의 납포체제 확립과정 -군호체제 붕괴과정을 중심으로-」, 『한국문화연구』 9, 1988.
  • 차문섭, 「임란 이후의 양역과 균역법의 성립」, 『사학연구』 10·11,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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