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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13 기준 최신판



선농제의 봉헌 대상으로 농사짓는 법을 최초로 발명하여 인간 세상에 널리 전파하고 가르쳤다고 알려진 신.

개설

‘신농씨(神農氏)’로도 별칭된다. 이에 대한 제향은 조선시대에 국가 제례로 편입되어 중사(中祀)인 선농(先農) 제례의 봉헌 대상이 되었다. 선농 제례에서는 신농을 정위(正位)에 모시고, 농사의 신인 후직(后稷)을 배위(配位)에 모셨다.

내용

신농씨는 농업을 최초로 발명하여 전파했을 뿐 아니라, 보습과 쟁기를 발명하고, 집을 짓고 불을 채취하는 법, 마을을 이루어 모여 살고 혼인하는 법, 가축을 사육하고 식량을 저장하는 법, 도기(陶器)를 굽고 방직(紡織)하는 법, 약초를 활용하는 법 등을 창안하고 널리 가르친 신령스런 인물로 알려져 있다. 농사짓는 방법을 최초로 창안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선농(先農)’이라고도 부르며, 곡식을 저장하는 방법을 창안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선색(先嗇)’이라고도 칭한다. 약초를 사용하는 방법도 최초로 알아냈기 때문에 의약의 신으로도 숭배되었다. 또한 후대에는 오행(五行) 중 화(火)를 다스리고 여름을 주관하는 천상의 상제(上帝)로도 인식되어 ‘염제(炎帝)’로 별칭되기도 하였다. 화와 여름을 주관하는 천상의 관리인 화정(火正) 축융(祝融)이 염제 신농씨를 보좌하였다.

농업의 신에 대한 제사는 삼국시대부터 시행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1년에 세 차례, 즉 입춘(立春) 후의 첫 번째 해일(亥日)에 선농을, 입하(立夏) 후의 첫 번째 해일에 중농(中農)을, 입추(立秋) 후의 첫 번째 해일에 후농(後農)을 각각 제향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도 선농, 중농, 후농을 모두 제향한 사실이 확인된다. 그러나 조선초기에 국가 의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중농과 후농에 제향한다는 문헌적 근거가 없다는 비판과 논의를 거친 끝에, 중농·후농 제례는 폐지되었다(『태종실록』 14년 4월 14일).

선농 제례를 거행한 시기는 시대별로 변화하였는데, 『예기(禮記)』「월령(月令)」에서는 맹춘(孟春) 원진(元辰), 즉 음력 1월 1일에 시행한다고 기술되었고, 당대(唐代)에는 맹춘의 해일 중 가장 길한 날인 길해(吉亥)에 거행하였다고 한다. 이에 비해 고려는 맹춘의 길해나 정월의 을해(乙亥)에 거행하였다. 조선초기에는 다양한 시일에 거행하였으나, 성종대에 이르러 매년 음력 2월 경칩(驚蟄) 후의 첫 번째 해일로 고정된 후 조선후기까지 그대로 봉행되었다.

한양의 동쪽에 선농단(先農壇)을 설치하고, 염제 신농씨와 후직씨(后稷氏)를 함께 제향하였다. 선농 제례는 중사 중에서도 보다 중요하고 격식과 등급이 높은 제례로 여겨져서 왕이 직접 제사를 드렸고, 의식 절차가 끝난 후에는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 왕이 몸소 밭을 가는 친경(親耕) 의례를 함께 거행하였다. 관련 의례로는 ‘향선농의(享先農儀)’, ‘친향선농의(親享先農儀)’, ‘친향선농기우의(親享先農祈雨儀)’, ‘향선농섭사의(享先農攝事儀)’ 등이 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 『예기(禮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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