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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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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훈련도감 |
한글표제 | 훈련도감 |
한자표제 | 訓鍊都監 |
상위어 | 오영군문(五營軍門) |
동의어 | 훈국(訓局) |
관련어 | 오위제(五衛制), 삼군문(三軍門), 삼수기법(三手技法), 병농분리제(兵農分離制), 장번제(長番制)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고종 |
집필자 | 윤훈표 |
폐지 시기 | 고종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훈련도감(訓鍊都監) |
조선후기 국왕의 시위와 수도 방위 등의 주축을 이루었던 중앙군영(中央軍營).
개설
훈국(訓局)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기존의 오위제(五衛制)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에 직면하였다. 이에 새로운 전술을 익힌 군사의 양성과 투입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특히 조총(鳥銃)을 앞세운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드디어 1593년(선조 26)에 설립되었다.
설립과 더불어 명나라 장수로 왜구(倭寇) 소탕에 큰 성과를 거둔 척계광(戚繼光)이 쓴 『기효신서(紀效新書)』의 군사편제와 전법을 채택하였다. 창설 당시에는 포수(砲手)로만 구성되었는데 『기효신서』의 삼수기법(三手技法)에 따라 살수(殺手), 사수(射手)도 첨가하였다. 한편 청나라에 대비하기 위해 마병을 증설하였다. 설립 당시에는 모집에 의해 군인을 충원하였으나 식년(式年)마다 각 지방에 군액을 할당하여 충원하는 승호제(陞戶制)를 채택했다. 이들에게는 급료 등을 지급하여 생계를 유지하도록 했다. 아울러 조총을 비롯하여 화약, 탄환 등을 생산하여 군인들에게 보급하였다. 주 임무는 국왕을 시위하는 것이었으며 수도의 치안 유지와 방위도 담당하였다. 지방군의 훈련에도 간여하였다. 그로 인해 중앙군의 핵심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의 조총을 활용한 전술에 크게 당황하였던 조선 정부는 그것을 제압하고자 포수의 양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1593년에 훈련도감을 설립하였다. 명나라 장수로 왜구 소탕에 큰 성과를 거둔 척계광이 쓴 『기효신서』의 군사편제와 전법을 채택하였다. 특히 속오법(束伍法)의 실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창설 당시에는 포수로만 구성되었는데 『기효신서』의 삼수기법에 따라 살수, 사수도 첨가하였다.
한편 청나라에 대비하기 위해 마병을 증설하였고 병자호란 이후에는 국출신(局出身)을 만들었다. 설립 당시에는 모집 등의 방식으로 자격이나 실력을 갖춘 군인들을 충원하였으나 차츰 재능 있는 자들이 입속을 꺼리고 사천(私賤) 등이 대거 들어오면서 혼란이 일어났다. 이에 모집하는 것 대신에 승호제를 채택해서 식년마다 지방에 군액을 할당하여 의무적으로 채우도록 했다. 만약 부족할 경우에는 부정기적으로 실시하는 별승호(別陞戶)도 실시하였다. 이로 인해 각 지방에서 징발되어 올라와서 근무하였던 군사에게 급료라든가 보포(保布) 등을 지급해서 생계를 유지하도록 했다.
조총이나 화약 등의 무기를 제작해서 보급하였는데 그것을 위해 별도로 무기제조장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원료 조달과 급료의 재원 마련 등을 위해 둔전(屯田), 시장(柴場), 광산 등을 운영하게 했다. 국왕을 시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으며, 도성 내 도적의 방비와 체포, 화재 방지 등에도 종사했으며, 수도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도성이나 북한산성의 수축과 관리도 담당하였다. 심지어 상황에 따라서는 국경 수비를 위해 부방(赴防)의 임무까지도 감당해야 했다. 지방군의 훈련에도 관계했으며 호랑이 사냥 따위의 대민 업무에도 참여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설립 초기의 최고 책임자였던 대장(大將)은 도감당상(都監堂上)이라고 했고, 그 밑에 직접 군사지휘를 담당하는 중군(中軍), 천총(千摠)이 있었다. 그 아래에 사(司)-초(哨)-기(旗)-대(隊)-오(伍)로 조직되었는데, 각각 파총(把摠)-초관(哨官)-기총(旗摠)-대장(隊長)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했다. 이는 『기효신서』의 속오법(束伍法)의 영향을 받아서 마련된 것으로 그 이후 많은 군영의 편성에 영향을 주었다.
기구가 확대되면서 의정(議政)이 겸하는 도제조(都提調) 1명, 병조 판서와 호조 판서가 겸하는 제조(提調)를 중심으로 종2품 대장 1명, 종3품 중군 1명, 정3품 별장(別將) 1명, 종4품 천총 2명, 정3품 국별장(局別將) 3명, 종4품 파총 6명, 종6품 종사관(從事官) 4명, 종9품 초관 34명을 두어서 지휘하게 했다. 도제조는 훈련대장 유고 시에는 대신 지휘를 맡으며, 제조와 함께 훈련도감 운영의 전반을 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훈련대장은 실질적인 지휘권과 도감 장관(將官)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정치적 비중이 상당하였다.
그리고 군관(軍官) 10명, 별군관(別軍官) 10명, 지구관(知彀官) 10명, 기패관(旗牌官) 20명, 권무군관(勸武軍官) 50명, 도제조군관(都提調軍官) 5명, 감관(監官) 6명, 약방(藥房)·침의(鍼醫)·마의(馬醫) 각 1명 등의 군사훈련이나 도감의 각종 행정에 종사하는 상층 군관들이 있었다. 이들 이외에 별무사(別武士) 68명, 한려(漢旅) 33명, 국출신 150명, 무예별감(武藝別監) 198명 등이 있었다.
변천
중앙의 중심 군영으로 자리 잡은 이후에 1861년(철종 12) 도망이 심한 6도 승호(陞戶)의 번상이 폐지되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1881년 고종이 친정 체제를 확고히 하고 나아가 새로운 방식으로 훈련된 군대를 육성하고자 군제개혁을 추진하면서 별기군이 설치되자 급격하게 위상이 추락하였다. 용호영, 호위청 등과 함께 무위영으로 합쳐졌다가 곧바로 분리되기도 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친군영(親軍營) 제도로의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1882년 폐지되었다.
의의
조선후기에 중앙 군영의 주축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 변화상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군사 조직이 되었다. 특히 종전의 병농일치제(兵農一致制), 번상제(番上制) 등의 방식에서 벗어나 병농분리제(兵農分離制), 장번제(長番制)로 운영됨으로써 중세적 체제에서 근대 체제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金鍾洙, 『朝鮮後期 中央軍制硏究』, 혜안, 2003.
- 車文燮, 『朝鮮時代軍事關係硏究』, 檀國大學校出版部, 1996.
- 車文燮, 『朝鮮時代軍制硏究』, 檀國大學校出版部, 1973.
- 吳宗祿, 「중앙군영의 변동과 정치적 기능」, 『조선정치사 1800~1863㈛』, 청년사, 1990.
- 陸軍士官學校 韓國軍事硏究室, 『韓國軍制史 - 近世朝鮮後期篇』, 陸軍本部, 1977.
- 李泰鎭, 『朝鮮後期의 政治와 軍營制 變遷』, 韓國硏究院, 1985.
- 윤훈표, 「조선후기 동궐의 宿衛 체계의 변화」, 『서울학연구』30,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