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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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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오수역 |
한글표제 | 오수역 |
한자표제 | 獒樹驛 |
상위어 | 오수도(獒樹道), 창활도(昌活道) |
관련어 | 통영로(統營路), 속역(屬驛), 역승(驛丞), 역리(驛吏), 역노(驛奴), 역비(驛婢), 찰방(察訪), 역보(驛保), 일수(日守), 솔정(率丁), 아전(衙前), 서자(書者), 마호(馬戶), 급창(及唱), 사령(使令), 방자(房子), 비자(婢子), 마종(馬從), 보종(步從), 마가청(馬價廳), 유경청(留京廳), 마호청(馬戶廳), 보급청(補給廳), 역가청(役價廳), 신혜별청(新惠別廳), 공수청(公須廳), 차비전(差備錢),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 임실군(任實郡) |
분야 | 경제/교통/육운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朝鮮) |
집필자 | 이승민 |
폐지 시기 | 1896년(건양 1) 1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오수역(獒樹驛)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1년 6월 10일, 『세조실록』 3년 9월 12일, 『세조실록』 8년 8월 5일 |
조선시대 전라도의 도로망인 오수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전라남도 임실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고려시대에는 성종에서 문종 연간에 역로(驛路)를 22역도(驛道)-525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하였는데, 오수역(獒樹驛)은 이때 남원도(南原道) 거령(居寧)에 위치해 있던 역이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에는 창활도(昌活道)에 속했다가, 세조대에 창활도가 오수도로 개칭·통합되면서 오수도(獒樹道)의 본역이 되었다. 그 뒤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오수역은 고려시대부터 전주 남원현 거령 지역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남원도에 속한 12개소의 역 가운데 하나였다. 정확한 설치 시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고려의 역제(驛制)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995년(고려 성종 14)에서 1067년(고려 문종 21) 사이에 남원도에 소속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에 전국적으로 역도-역로 조직을 갖추는 과정에서 전라도의 역도인 창활도에 소속되었다. 세조대에는 제원도(濟原道)·삼례도(參禮道)·영보도(永保道)·경양도(景陽道)에 속한 일부 역들과 함께 오수도로 통합되면서 오수도에 속하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남원 편에 따르면, 오수역에는 역마 15필과 역리(驛吏) 613명, 역노(驛奴) 120명, 역비(驛婢) 57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또한 오수역은 오수도의 본역(本驛)이었으므로, 문관 종6품의 오수도 찰방(察訪)이 주재하며 역에 관한 각종 업무를 맡아보았다. 그런데 1872년(고종 9)에 편찬된 『호남읍지(湖南邑誌)』「오수역지(獒樹驛誌)」에는 역리 727명, 역노 178명, 역비 42명으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그밖에도 역보(驛保) 322명, 일수(日守) 10명, 솔정(率丁) 161명, 인호(人戶) 360명 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895년(고종 32)에 편찬된 『호남역지(湖南驛誌)』에 따르면 아전 24명, 서자(書者) 21명, 통인(通引) 17명, 마호(馬戶) 15명, 급창(及唱) 7명, 사령(使令) 12명, 방자(房子) 5명, 비자(婢子) 7명, 마종(馬從) 15명, 보종(步從) 15명과 기타 역보·일수·솔정 등도 있었다. 이로 미루어 조선후기에는 역민의 구성이 매우 다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오수역에는 마가청(馬價廳)·유경청(留京廳)·마호청(馬戶廳)·보급청(補給廳)·역가청(役價廳)·신혜별청(新惠別廳)·공수청(公須廳) 등의 역사(驛舍)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부역실총(賦役實總)』에 따르면 오수역의 차비전(差備錢)은 891냥이었다.
변천
조선전기 세종대에는 전국적인 규모의 역로를 조직했는데, 이때 오수역은 창활도역승이 관할하는 12개 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역역(驛役) 중에는 긴급한 군사 정보나 왕명을 전달하는 일 외에도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迎送)과, 공적인 일로 지방에 나간 고관의 먹을 것과 쓸 물품을 공급하는 지대(支待) 및 역마를 길러 바치는 입마(立馬)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사신 왕래에 대한 기별은 역리가 직접 달려가 전달하였다. 세종 연간에 창활도의 본역은 창활역이었는데, 전라도로 내려가는 통영로의 첫 역은 창활역이 아닌 오수역이었다. 더욱이 오수역과 창활역의 거리가 60리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역리가 사신을 영송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1439년(세종 21)에 창활도의 본역을 오수역으로 바꾸게 되었다(『세종실록』 21년 6월 10일).
세조대에 들어와서는 창활도를 오수도로 개칭하면서 오수도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 1457년(세조 3)에는 제원도·오수도·삼례도·영보도·경양도의 일부 역을 오수도로 통합했는데(『세조실록』 3년 9월 12일), 그 과정에서 오수역은 오수도의 본역이 되었다. 또 1462년(세조 8)에는 병조의 건의에 따라 각 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해 찰방과 역승을 두게 했는데, 이때 창활역 등과 함께 오수도 찰방의 관할로 확립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그 뒤 조선후기까지 존속했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철폐되었다.
오수역은 『여지도서』·『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 따르면 남원도호부 북쪽 40리 지점에 있었다.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는 전라북도 임실군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역원 조사표」에는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둔남면은 1992년에 지방자치법에 의해 오수면으로 개칭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호남읍지(湖南邑誌)』
- 『호남역지(湖南驛誌)』
- 『부역실총(賦役實總)』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