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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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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안동진 |
한글표제 | 안동진 |
한자표제 | 安東鎭 |
상위어 | 주진(主鎭), 병영(兵營), 순영(巡營) |
하위어 | 제진(諸鎭), 속읍(屬邑) |
동의어 | 거진(巨鎭), 안동진관(安東鎭管), 안동진영(安東鎭營), 안동토포영(安東討捕營) |
관련어 |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안동영장(安東營將), 안동토포사(安東討捕使),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衛), 순찰사(巡察使)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서태원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안동진(安東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15년 2월 26일 |
조선시대 경상도 안동대도호부에 설치한 육군 거진.
개설
안동진은 1457년(세조 3) 진관체제(鎭管體制)가 시행될 때 경상도 육군 거진(巨鎭)으로 설치되었다. 안동대도호부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하여 평시에 제진(諸鎭) 군병의 훈련과 점검을 주도하면서, 유사시에는 안동진관을 중심으로 방어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초기의 육지 전투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의 조총과 진관체제의 문제점 등으로 고전하자, 정부는 1594년(선조 27)부터 지방군을 개혁하는 가운데 안동진영도 설치하였다. 안동진영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와 맞서 싸웠으며, 민란 진압과 도적 체포 등 치안도 담당하였다.
안동진영은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전기에 안동진은 거진인 안동진관으로, 군익도(軍翼道)체제를 대신하여 1457년(세조 3) 진관체제가 시행되면서 설립되었다. 진관체제는 군익도의 ‘도’가 행정구역의 도와 혼동되는 것을 막고, ‘도’라는 지역적 성격보다 ‘진’이 갖는 군사기지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하지만 여진족이나 왜구가 특정 지역을 상습적으로 침입하거나 대규모로 침략하면서, 진관을 각각 방어하는 진관체제와는 달리 중앙 군사지휘관을 파견하여 특정 지역을 집중적으로 방어하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이 유사시 방어전술로 새롭게 채택되었다. 때문에 임진왜란 직전 안동진은 평시나 침략한 적병의 수가 적을 경우 진관체제에 의해, 적병의 수가 진관이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인 경우 중앙에서 파견된 군사지휘관의 지휘를 받으면서 경상도의 다른 진과 함께 작전을 펼치는 제승방략에 의해 운용되도록 하였다.
안동진은 조선후기에는 안동진영으로 불렸다. 임진왜란 초기 육지 전투에서 일본군의 조총과 수령이 육군의 군사 지휘관을 겸임한 진관체제 및 중앙지휘관 파견·특정 지역의 방어 실패로 인한 제승방략선의 문제점 등이 노출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즉 정부는 명나라의 『기효신서』를 도입하여 포수 중심의 삼수병(三手兵)을 육성하고, 군대의 편제도 ‘영(營)-사(司)-초(哨)-기(旗)-대(隊)’로 바꾸면서 각각의 영을 중심으로 훈련과 방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또한 영장을 파견하여 수령 대신 군병을 지휘하게 하는 등, 1594년(선조 27)부터 지방군을 개편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안동진영이 설치된 것이다.
조직 및 역할
조선전기의 거진 안동진은 안동대도호부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임하여, ‘영해, 청송, 예천, 영천, 풍기, 안동, 의성, 봉화, 진보, 군위, 비안, 예안, 영덕, 용궁’ 등 제진의 훈련과 점열을 하였고, 유사시에는 제진의 군병을 집결시켜 안동진관을 방어하였다. 조선후기에는 경상도 전영(前營)으로서 조선전기 거진인 안동진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안동진영의 속읍은 ‘안동, 영해, 청송, 순흥, 예천, 풍기, 영천, 의성, 영덕, 용궁, 예안, 봉화, 진보, 영양, 비안’이다. 군병은 ‘별장 2명, 천총 3명, 파총 10명, 지구관 2명, 초관 59명, 기패관 149명, 영장표하군 56명, 장관표하군 779명, 기수군 86명, 취고수 42명, 당보군 73명, 속오마군 725명, 보군 4,895명, 복마군 446명, 화병 496명’ 등 총 7,823명이었다.
안동진영은 영장순력(營將巡歷)을 통해 속읍 속오군 등의 훈련과 무기·복장 상태를 점검하였다.
명나라 후손인 안동영장선세강(宣世綱)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와 쌍령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사망했으며(『인조실록』 15년 2월 26일), 1871년(고종 8)에는 문경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민란을 일으키려다가 체포된 무리 중 일부를 안동진영에 가두었다.
안동진영은 1665년(현종 6) 영장이 토포사를 겸함에 따라 토포영이 되었는데, 1881년 진영의 포군(砲軍)과 교졸(校卒)이 중심이 되어 무리를 지어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명화적을 체포한 바 있다.
변천
조선전기에는 안동진관이었고, 임진왜란 중에 진영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후기에 안동진영으로 바뀌었다. 안동진영의 속읍은, 안동진관의 14개에서 ‘군위’가 제외되는 대신 ‘순흥, 영양’이 추가됨으로써 15개로 늘었다.
1654년(효종 5) 이후 안동영장의 파견이 확정됨으로써 안동부사의 속읍에 대한 군사 지휘권이 안동영장에게 넘어갔다.
1665년부터 안동진영은 토포영도 겸하였다. 1895년 을미개혁으로 인하여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각사등록(各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 『양역실총(良役實總)』
- 『기효신서(紀效新書)』
- 김우철, 『조선후기 지방군제사』, 경인문화사, 2001.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영장제를 중심으로-』, 혜안, 1999.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서태원, 「조선후기 청주진영연구」,『호서사학』42, 2005.
- 허선도, 「제승방략연구(상·하)-임진왜란 직전 방위체제의 실상-」,『진단학보』36·37, 1973·197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