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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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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성중관 |
한글표제 | 성중관 |
한자표제 | 成衆官 |
하위어 | 근시사위(近侍四衛), 사막(司幕), 사순(司楯), 사옹(司饔), 사의(司衣), 사이(司彞), 충용사위(忠勇四衛) |
동의어 | 성중아막(成衆阿幕), 성중애마(成衆愛馬) |
관련어 | 금군(禁軍), 다방좌우번(茶房左右番), 사문(司門)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조선시대 |
집필자 | 차인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성중관(成衆官) |
조선시대에 내금위(內禁衛)·충순위(忠順衛)·충의위(忠義衛)·충찬위(忠贊衛)·별시위(別侍衛)·족친위(族親衛) 등에 속하여 궁궐의 호위와 근시(近侍)의 일을 맡아보는 관리.
개설
성중관(成衆官)은 성중아막(成衆阿幕)이나 성중애마(成衆愛馬)로도 불렸고, 약칭하여 성중(成衆)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 성중관은 본래 문무관(文武官)이던 고려의 내시(內侍)가 여말에 서리(胥吏) 출신의 성중관으로 변모한 것이다. 고려시대 내시라는 용어는 주로 문무관 출신인 근시를 지칭한 반면, 조선 세종 말 이후에는 환관 내시를 지칭하는 말로 변질된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고려의 내시는 조관내시(朝官內侍)·서리내시(胥吏內侍)·산관내시(散官內侍)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무관 출신의 조관내시가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초기 문관 중심으로 구성된 조관내시는 점차 무관의 진출이 허용되었고, 충렬왕(忠烈王) 초를 전후하여 천예 출신의 내료(內僚)가 내시에 입속하면서 범주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1356년(고려 공민왕 5)에 친위군인 충용위(忠勇衛)가 설치된 후 무반직이 장교로 대거 편입됨에 따라 내시의 조직이 서리 출신의 성중관을 주축으로 변화되었다. 특히 무반직 내시의 빈자리에 군역을 회피하려는 한미한 인물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끝내는 성중관으로 변모하여 조선초까지 이어졌다.
조선 건국과 더불어 10위(衛) 설치가 표방되고, 중앙군 체계가 갖추어지지만 성중관인 성중애마가 그대로 내려와서 궁실 숙위를 담당하였다.
성중애마는 애마인(愛馬人)과 한량자제(閑良子弟) 중 무재(武才)가 있거나 강장(强壯)한 자를 선발해서 편입시켰는데, 세종 초반까지 소수의 정액을 유지한 점으로 보아 갑사(甲士)에 비해 높은 지위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담당 직무
성중애마는 충용사위(忠勇四衛)·근시사위(近侍四衛)를 비롯하여 사순(司楯)·사의(司衣)·사막(司幕)·사이(司彞)·사옹(司饔) 등으로 구성되었다. 충용위는 궁성의 숙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친위대로 편성한 부대인데 4령(領)으로 조직되었고, 근시사위는 1275년(고려 충렬왕 1)에 의관자제로서 원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자로 숙위 부대를 만들었다. 여러 계열의 성중애마는 각각의 설치 배경과 군사적 기능이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왕궁의 시위 군사이라는 공통적 특징을 갖는다. 특히 내금위·내시위(內侍衛) 등의 성중애마는 측근에서 국왕의 호위하는 것이 주 임무였으며, 궁문을 파수하는 갑사와는 업무상 다소 차이를 보였다. 또한 성중애마는 병법(兵法)·태일산법(太一筭法) 등 전문적인 군사 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조선전기 성중애마는 그 혁파가 논의되었지만, 새로운 궁궐 숙위 체제가 갖추어지기 전까지 궁궐 시위군으로 명맥이 유지되었다. 성중애마는 치폐를 거듭하였지만, 대부분은 존치되다가 1401년(태종 1)에 경호 업무를 주 임무로 하는 별시위가 창설되면서 삼군부(三軍府)로 이속되었다.
변천
성중관은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조직과 기능이 변화되었다. 고려시대 성중관은 내시·다방(茶房)의 별감(別監)·사의·사이·사준(司樽)·사옹 등 문반 소속의 궁관(宮官)을 지칭한 용어였다. 원의 지배 이후 궁중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원(元)나라의 숙위군과 유사한 홀적(忽赤)·충용(忠勇)·별보(別保) 등을 신설하고 애마(愛馬)라고 지칭하였다. 한편 성중관이 숙위의 임무에 편입되면서 성중관과 애마의 호칭을 혼용하였다. 따라서 고려말 성중관은 궁관과 시위군을 지칭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성중관의 범주가 고려의 궁관과 시위군뿐 아니라 녹사(綠事)·지인(知印)과 별시위·내금위·내시위 등 신설된 시위군으로 확대되었다.
조선초기 신설된 성중관 가운데 별시위는 1400년(태종 즉위)에 창설된 군대로 갑사보다 위상이 높은 병종이었다. 별시위의 선발은 내금위의 취재(取才)에 뽑힌 사람과 무과 복시(覆試)에 화살 여섯 개 이상을 맞힌 사람으로 편성되었다. 인원은 1,500명이 5교대로 나누고, 300명이 6개월씩 교대 근무하였다. 또한 내금위는 1407년(태종 7)에 궁중에 숙직했던 내상직(內上直)을 개편하여 조직되었다. 내금위는 왕의 근시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양반인 ‘의관자제’ 가운데 측근 세력으로 조직되었다. 창설 당시 내금위의 정원은 비교적 적은 60~90명으로 편성되었으나, 1439년(세종 21)에 일시적이지만 200명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한편 세조대 성중관 가운데 내시·다방·지인 등이 혁파되고 녹사만이 존치되었다. 또한 조선후기에는 성중관은 내금위·충의위·충찬위·충순위·별시위·족친위 등 금군(禁軍)을 가리키는 의미로 변화되었다.
참고문헌
-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韓國軍制史 -近世朝鮮前期篇-』, 육군본부, 1968.
- 윤훈표, 『여말선초 군제개혁연구』, 혜안, 2000.
- 김재명, 「高麗後期 內侍制의 變化」, 『정신문화연구』 26 , 2003.
- 한영우, 「조선초기의 上級胥吏 成衆官 -성중관의 기사로의 일원화과정-」, 『東亞文化』 10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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