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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5 기준 최신판



호조(戶曹) 등의 관서에 소속된 녹봉이 지급되지 않던 6품의 관직.

개설

별제(別提)는 제거(提擧)·제검(提檢)·별좌(別坐)·별검(別檢) 등과 함께 녹봉이 지급되지 않던 무록관(無祿官)의 하나이다. 설치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1467년(세조 13) 이전에 설치된 듯하다(『세조실록』 13년 10월 8일). 별제 등의 무록관 신설은 국가 재정의 절약과 함께, 권지직(權知職) 혁파 이후 양반 자제들이 처음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관직이 대폭 축소되자 이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밖에도 재임 중 상을 당해 관직을 떠나는 사람 등 일시적으로 관직을 떠난 이들을 다시 관직에 등용하고자 할 때 이들과의 소통을 위해 신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별제는 6품의 관직으로 호조를 비롯해 형조나 동평관(東平館) 등에 설치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동평관 소속 별제가 혁파된 듯하며, 호조를 위시해 모두 21개 관서의 소속 관직으로 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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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에 규정된 별제는 대부분 음서(蔭敍) 자제들에게 배정된 반면, 호조의 산학별제와 형조의 율학별제만은 잡업인(雜業人)을 뽑아 쓰도록 규정하였다.

담당 직무

별제는 해당 관서에서 실무에 종사하였다. 예를 들어 내수사 별제의 경우 궁궐 내 왕실에서 사용하는 쌀이나 포(布)를 비롯해 노비 등의 관리를 담당하는 등 실무적인 일에 종사하였다. 한편 도화서와 활인서, 와서, 귀후서 소속의 별제는 실질적인 관서의 주재관(主宰官)이 되어 관서 업무를 총괄하기도 하였다. 별제 등 무록관은 비록 녹봉이 지급되지는 않았으나 동반 실직(實職)으로서, 360여 일의 근무 기간이 지나면 다른 관직으로 옮길 수 있었다.

변천

별제를 비롯한 무록관은 이미 중종 연간부터 음서 자제들이 과거 시험을 거치지 않고 벼슬을 시작하는 관직으로 지적되는 등 주로 음직(蔭職)으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이후 음직의 변통 과정에서 몇 차례 제도적인 변화가 있었다. 인조 연간에는 6품의 별제가 참하 인원으로 차정되는 것을 금지하여 참상 인원으로 충당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숙종 연간에는 음관을 확대하기 위해 빙고 별검 4명 중 2명을 별제로, 전설사 별검 3명 중 2명을 별제로 바꾸어 직급을 상향 조정하였다. 1795년(정조 19)에도 음관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조지서와 활인서의 별제를 각 1명씩 증원하였다.

이 같은 관직의 변통 및 관서의 설치와 폐지 과정을 통해서 조선후기에는 『경국대전』에 비해 변화가 있었다. 즉 호조의 산학별제와 형조의 율학별제는 『속대전』 단계에서 2명에서 1명으로 축소되었다가, 율학별제의 경우 『대전통편』 단계에서 다시 2명이 되었다. 교서관이나 수성금화사·전연사·소격서·사축서 등은 관서가 혁파되면서 함께 소멸되었다. 이 밖에도 『속대전』 단계에서 상의원은 1명이 되었고, 군기시와 예빈시는 혁파되었으며, 조지서와 활인서는 2명이, 와서는 1명이, 귀후서는 4명이 감원되었다. 이 가운데 조지서의 경우만은 『대전회통』 단계에서 다시 1명이 증원되었다. 『대전통편』 단계에서도 전설사나 빙고·장원서·사포서 등 종래 정·종6품직으로 규정되었던 것을 모두 종6품직으로 개정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임민혁, 『조선시대 음관연구』, 한성대학교 출판부, 2002.
  • 박홍갑, 「조선전기의 무록관」, 『교남사학』 2, 1986.
  • 한충희, 「조선초기 육조속아문연구 2: 관직의 정비를 중심으로」, 『계명사학』 12,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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