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행궁(平壤行宮)"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9일 (토) 22:5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평양행궁 |
한글표제 | 평양행궁 |
한자표제 | 平壤行宮 |
상위어 | 서경(西京), 행궁(行宮) |
동의어 | 서경행궁(西京行宮), 풍경궁(豐慶宮) |
관련어 | 어진(御眞), 예진(睿眞), 이궁(離宮), 자혜의원(慈惠醫院), 진위대(鎭衛隊), 칭경예식(稱慶禮式) |
분야 | 왕실/왕실건축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대한제국기 |
집필자 | 목수현 |
장소 | 함경남도 평양 외성(外城) 내 |
규모(정면/측면/칸수) | 태극전: 정면 9칸/측면 5칸 |
양식 | 팔작지붕 |
관련 인물 | 김규홍(金奎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평양행궁(平壤行宮)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39년 5월 1일, 『고종실록』 39년 6월 23일, 『고종실록』 40년 11월 18일, 『고종실록』 41년 2월 2일, 『순종실록』 1년 11월 18일 |
1903년(광무 7) 고종의 어진과 순종의 세자시절 화상인 예진을 봉안한 평양의 행궁.
개설
평양행궁은 고종이 1902년(광무 6) 5월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행궁을 설치해 국가 만년 관아를 삼겠다며 내린 조칙에 따라 지어졌다. 궁내부 특진관(特進官)김규홍(金奎弘)이 조선 태조가 한양과 개성으로 수도를 옮겼던 일 등을 예로 들어 두 개의 수도를 세우는 일의 타당함을 상소하자, 고종은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이궁(離宮)을 지을 것을 명하였다(『고종실록』 39년 5월 1일). 이는 행궁을 지음으로써 황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한 것이었다.
평양행궁의 공사는 1902년 6월 3일부터 시작되었으며, 당시 평안남도관찰사민영철(閔泳喆)의 책임하에 평안남〮북도 각지에서 조달한 재원과 황실에서 내려준 내탕전 50만 냥을 바탕으로 2년여에 걸쳐 공사를 진행하였다.
위치 및 용도
의정부(議政府)에서는 궁내부(宮內府)와 홍문관(弘文館)과 협의하여 평양행궁의 건물과 문 이름을 정하였다. 궁호는 풍경(豐慶), 정전(正殿)의 이름은 태극(太極), 편전(便殿)은 지덕(至德), 동궁전(東宮殿)은 중화(重華)로 하였으며, 정문(正門)의 이름은 황건(皇建), 동문(東門)은 건원(建元), 서문(西門)의 이름은 대유(大有)로 지었다(『고종실록』 39년 6월 23일).
본래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자 지은 이궁이었으나, 당시는 러일전쟁과 일제의 침탈이 극에 달한 격변기여서 고종이 실제로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신 고종은 풍경궁에 어진을 봉안하였다. 1902년(광무 6)은 고종이 51세로서 육순을 바라보는 의미에서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하고, 등극 4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여 어진을 그리게 하였는데, 이를 풍경궁에 봉안함으로써 평양행궁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정전인 태극전에는 고종의 어진을, 동궁전인 중화전에는 왕세자의 예진(睿眞)을 봉안하였다. 어진과 예진을 봉안하는 일은 의정부(議政府) 의정(議政)이근명(李根命), 장례원(掌禮院) 경(卿)조정구(趙鼎九), 비서원(祕書院) 경(卿) 이재극(李載克) 등이 하였다.
평양행궁을 관리하도록 칙임관(勅任官)인 정리사(整理使)와 부정리사를 두었으며 평양 주둔 지방군인 진위대(鎭衛隊)가 이를 지켰다. 정리사는 풍경궁의 태극전과 중화전을 예문(禮文)에 의거하여 봉안하고, 어진과 예진을 지키며, 풍경궁 내 일체의 사무를 관리하고 소속관원을 감독하였다. 부정리사는 평안도관찰사가 겸임하였고, 부사는 함경도관찰사가 겸임하였으며, 참서관(參書官) 3인과 주사(主事) 4인을 두었다(『고종실록』 40년 11월 18일). 1904(광무 8) 2월 궁내부 관제를 개정하면서 풍경궁에 경무관 1명을 더 두도록 하였다(『고종실록』 41년 2월 2일).
변천 및 현황
풍경궁 공사 중 러일전쟁이 발발하여 완공을 못 하고 중단하였는데, 1905년(광무 9) 7월 20일 풍경궁(豐慶宮) 참서관(參書官)최익환(崔益煥)이 상소를 올려 풍경궁 공사를 다시 벌여 준공하도록 청하기도 하였다. 1908년(융희 2)에 태극전의 어진과 중화전의 예진은 경운궁의 정관헌으로 옮겼다(『순종실록』 1년 11월 18일).
평양행궁은 이후 비어 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3년부터 자혜의원 건물로 전용되어 1923년 기존 건물을 유지하면서 건물을 신축하기도 하였으나 1934년에 많은 전각이 헐려 철거되었다. 정문인 황건문은 서울의 일본계 사찰 조계사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되었으나 뒤에 역시 훼손되어 없어졌다.
형태
평양행궁은 전체 360칸의 거대한 건물이었다. 정문인 황건문과 정전인 태극전, 편전인 지덕전이 남북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고 배치되었으며, 동궁인 중화전은 지덕전의 동쪽에 두었다.
황건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우진각 지붕의 문으로 궁궐 정문의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정면에는 황건문이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다. 황건문 안쪽에는 회랑으로 연결되는 정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한 중문도 갖추고 있었다.
정전인 태극전은 정면 9칸, 측면 5칸으로, 장대석 기단으로 쌓은 월대를 갖춘 위에 장중한 건물이다.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으며 초익공 양식에 팔작지붕 집으로 경운궁의 침전인 함녕전과 유사하게 생겼으나, 건물 양쪽의 한 칸씩은 주초석 위에 기둥을 받치고 정자처럼 공간을 띄운 점이 다르다.
편전인 지덕전은 정면 9칸, 측면 3칸의 건물이었으며 중화전은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서쪽에 누마루가 나온 형식이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고종은 평양행궁을 건설하도록 한 1902년(광무 6)에 망육순과 등극 40주년을 맞았다. 이 해에는 이를 기념하는 칭경예식(稱慶禮式) 등 여러 행사를 준비하였으나 괴질이 도는 등 시국이 어지럽게 되자 시행하지 못하였다. 다만 고종의 어진과 황태자의 예진을 그리게 하였으며, 이를 한양에서 평양까지 봉안하는 행차를 벌였다.
참고문헌
- 『서경풍경궁영건역비회계책(西京豐慶宮營建役費會計冊)』
- 김순일, 「풍경궁 영건에 관한 연구」, 『부산대학교 공과대학 연구보고』35, 1988.
- 김윤정·서치상, 「광무 6년의 평양 풍경궁 창건공사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계획계』제25권 9호, 2009.
- 신명호, 「光武·明治시기 兩京체제 추진과 君主이미지 활용 비교연구」, 『동북아 문화연구』23, 2010.
- 장필구·전봉희, 「풍경궁과 화성행궁의 자혜의원 전용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계획계』제28권 12호, 201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