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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1:22 기준 최신판



도성인 한양의 동대문.

개설

조선은 건국과 더불어 한양에 성곽을 쌓고 사대문과 사소문을 두어 도성에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사대문으로 정북(正北)에 숙청문(肅淸門), 정동(正東)에 흥인문(興仁門), 정남(正南)에 숭례문(崇禮門), 정서(正西)에 돈의문(敦義門)을 두었다. 사대문의 명칭은 맹자의 사단(四端)에 기초하여 만들어졌다. 이 가운데 동쪽은 오행 중에서 목(木)에 해당하며, 목에 해당하는 인(仁)을 사용해 흥인문이라고 하였다.

위치 및 용도

도성의 동쪽에 위치하며 도성을 드나들 때 이용하는 문이다.

변천 및 현황

조선은 개국과 더불어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1396년(태조 5) 한양에 성곽을 쌓았다(『태조실록』 5년 9월 24일). 성곽을 쌓는 데 있어 성의 터가 높고 험한 곳에는 돌로 석성(石城)을 쌓았고, 평탄한 곳에는 흙으로 토성(土城)을 쌓았다. 특히 흥인문이 위치한 곳은 습지여서 말뚝을 박고 돌을 쌓은 후에 성곽을 만들어야 했다. 때문에 공력이 다른 곳의 배가 들었다고 한다.

흥인문의 옹성은 1397년에 만들어졌다(『태조실록』 6년 4월 28일). 정약용은 「옹성도설(甕城圖說)」에서 오직 흥인문만 옹성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도성 대문 가운데 오직 흥인문에만 옹성이 만들어진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이 전한다. 백호인 인왕산(仁王山)에 비해 청룡인 낙타산(駱駝山)의 산세가 약하기 때문에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흥인문에만 옹성을 두었다는 것이다. 또한 흥인문에만 ‘지(之)’ 자를 첨가해 ‘흥인지문’이라고 현판을 건 것도 역시 이것과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태조 때 만들어진 흥인문은 문종대에 이르러 중수 논의가 있었고, 1451년에 일부 수리가 이루어졌다(『문종실록』 1년 3월 17일). 이때 공사에 대해 단종은 “동문을 고쳐 짓고자 하여 재목을 모았는데 술자(術者)가 봄에는 동문을 짓지 않는다고 하여 이루지 못했다.”고 하였다(『단종실록』 즉위년 9월 30일). 이것으로 보아 전면적인 중수가 아니라 부분 보수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흥인문의 본격적인 중수는 1452년(단종 즉위)에 시작하여 이듬해에 마쳤다.

이후 흥인문 중수에 관한 기록은 고종대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1642년(인조 20)과 1653년(효종 4)에 흥인문에 불이 난 일이 있고(『효종실록』 4년 3월 15일), 1675년(숙종 1)에 흥인문 북쪽 문판에 불이 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 작은 화재라서 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 1724년(경종 4)에 흥인문의 옹성을 개축한 일이 있다.

현재의 흥인문은 1868년(고종 5)에 중수한 것이다. 당시의 상량문에 따르면 대지가 낮아 8자 정도 돋운 다음 새롭게 홍예를 쌓고 초루를 중건했다고 한다. 공사는 1868년 10월 20일에 착공하고, 1869년 2월 26일에 주춧돌을 설치하여 기초를 잡고, 3월 11일에 상량하였으며 같은 달에 완공하였다. 흥인문의 공사가 완료된 다음 새롭게 만들어진 흥인문이 기존의 옹성 및 좌우 체성과 높이가 맞지 않아 이를 맞추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막힌 물길을 뚫기 위해 새롭게 수문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흥인문은 문루에서 물이 새고 추녀가 기울어지는 등 보수가 필요해 1881년에 수리하였다.

형태

흥인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평면형을 하고 있으며, 중층으로 건립되었다. 지붕은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고, 양성으로 마감했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두었다. 공포는 다포 형식을 하고 있는데 하층은 외2출목, 상층은 외3출목으로 구성했다. 건물의 가구는 숭례문과 마찬가지로 중앙에 심고주(心高柱)를 세우고 이곳에 맞보를 결구(結構)하여 만들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흥인문의 수리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내용이 전한다. 조선조에는 국장(國葬)이 있을 경우, 대여(大轝)가 흥인문을 통과해 도성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1659년에 치러진 효종의 국장 때 대여와 흥인문의 너비 및 높이를 비교해보니 흥인문의 높이가 낮았다. 새롭게 만든 대여가 이전보다 커서 흥인문을 통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흥인문에 깔아놓은 박석을 걷어낸 다음에야 대여가 지나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1684년 명성왕후, 1724년 경종, 1776년 영조의 국장에서도 반복되었다. 즉 흥인문을 크게 중수하지 않고 국장이 있을 때마다 반복적으로 박석을 걷어낸 다음, 의식이 끝난 후 다시 메우는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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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울흥인지문 정밀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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