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문(肅淸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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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도성의 4대문 가운데 북쪽의 문.

개설

1396년(태조 5) 정월 전국에서 11만 8천 70여 명이 동원된 축성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도성을 둘러싸는 성곽을 건설하는 역사로, 성곽의 거리는 59,500척, 약 18㎞에 이르는 큰 공사였다. 토성(土城)과 석성(石城)을 섞어 쌓았으며 4대문과 4소문, 곳곳에는 수구문(水口門)을 갖춘 성곽이었다. 정북(正北) 쪽의 문이 숙청문(肅淸門)으로 가장 험준한 지역에 놓인 문이다. 각각의 문은 월단누합(月團樓閤)의 형태, 즉 아래는 육축을 갖춘 홍예문이고 그 위에 누각을 둔 문으로 건설되었다(『태조실록』 5년 9월 24일).

숙청문은 양주의 북한산으로 통하는 문이었지만 언제부터인지 문을 폐치하여 사람이 통행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풍수지리상 음의 기운이 강한 곳이라 하여 가뭄이 심해질 때면 숭례문을 닫고 숙청문을 열어 비를 기원하였다.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다가 군인이 통행해야 할 때나 유사시에 문을 열었던 듯하다. 위에 문루를 달지 않은 암문의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위치 및 용도

종로구 삼청동 북악산 동쪽의 고갯마루에 놓여있다. 서쪽으로 약 700m 거리에 곡성(曲城)이 있다. 서울 성곽에는 서쪽과 북쪽에 두 개의 곡성을 설치했는데, 이는 방어 시설로 화성 성곽에서 보이는 ‘치(雉)’와 같은 기능의 시설이다. 그 형태가 둥글게 조성되어 곡성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숙청문의 곡성’ 또는 ‘숙청문 서옹성’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흥인지문의 문루 앞으로 내민 옹성과는 다른 것이다(『광해군일기(중초본)』 4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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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및 현황

토성과 석성을 섞어 축성했던 태조 시기부터 숙청문 구역은 석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재 숙청문 주변의 성체는 태조, 세종, 숙종 시기의 성곽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어 성 쌓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1504년(연산군 10) 7월 25일의 기사에 숙청문을 막고 오른편에 새 문을 만들라는 내용이 있어 위치가 조금 변동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연산군일기』 10년 7월 25일). 중종 때 숙정문(肅靖門)으로 불리면서 숙청문, 북청문(北靑門), 북정문(北靖門) 등이 혼용되어 불리다가 숙정문으로 굳어진 듯하다. 남대문, 동대문 등과 달리 ‘대(大)’ 자가 붙지 않고 단지 북문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문루가 없고 더불어 현판을 달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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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

본래는 문루가 없는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북악산 마루에 월단누합을 제대로 갖춘 위용 있는 문이 서 있다. 1976년 복원하면서 다른 문의 제도와 같게 하였기 때문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숙청문은 음의 기운이 강하기 때문에 가뭄이 있을 때 양기를 누르기 위해 평소에는 닫아두었던 문을 열고, 북을 치는 대신 징을 치며 비를 기원하였다. 속설에 따르면 처음 문이 열렸을 때 성 안의 남녀들에 의해 음란한 풍조가 조성되었기 때문에 숙청문을 닫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속잡록(續雜錄)』1599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만기요람(萬機要覽)』
  • 『경세유표(經世遺表)』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