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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일 (월) 21:0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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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오교양종 |
한글표제 | 오교양종 |
한자표제 | 五敎兩宗 |
상위어 | 불교(佛敎) |
하위어 | 계율종(戒律宗), 법상종(法相宗), 법성종(法性宗), 원융종(圓融宗), 열반종(涅槃宗),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
관련어 | 남산종(南山宗), 선교양종(禪敎兩宗), 승록사(僧錄司), 시흥종(始興宗), 오교구산(五敎九山), 자은종(慈恩宗), 중도종(中道宗), 화엄종(華嚴宗)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말기~조선초기 |
집필자 | 김용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오교양종(五敎兩宗)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6년 3월 27일,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세종실록』 2년 1월 26일, 『세종실록』 6년 4월 5일 |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에 불교의 주요 종파들을 통틀어 이르던 말.
개설
오교양종(五敎兩宗)은 고려시대 말기에 불교의 대표적인 종파들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오교는 대체로 의천의 묘지명에서 거론된 계율종(戒律宗)·법상종(法相宗)·법성종(法性宗)·원융종(圓融宗)·열반종(涅槃宗)을, 양종은 조계종(曹溪宗)과 천태종(天台宗)을 말한다. 이후 조선시대 초기에도 불교 종파들을 통칭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태종대에 불교 종파 11개를 7개로 축소 통합하고, 세종대에 이를 다시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합치면서 오교양종이라는 명칭은 사라지게 되었다.
내용 및 변천
오교양종에 대한 기록은 고려 원종대(1260~1274)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앞서 11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대각(大覺) 국사(國師)의천(義天) 당시에는 선종을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통칭하는 선적종(禪寂宗)이라고 불렀고, 교종을 대표하는 것은 계율(戒律), 법상(法相), 법성(法性), 원융(圓融, 화엄), 열반(涅槃)의 오교였다. 이후 기존의 선종은 조계종으로 칭해졌고 의천에 의해 창건된 천태종도 선종에 들어갔다. 고려말의 오교양종 가운데 오교는 기존 교종의 계율, 법상, 법성, 원융(화엄), 열반을 가리켰고, 양종은 선종의 조계종과 천태종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태종대에는 억불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즉위 초부터 오교양종의 혁파 문제가 논의되었다. 1406년(태종 6) 11개의 불교 종파명이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는데 조계종, 총지종(摠持宗),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 법사종(法事宗), 화엄종, 도문종(道門宗), 자은종(慈恩宗), 중도종, 신인종(神印宗), 남산종, 시흥종이었다. 이를 기존의 오교양종에 비정해 보면, 남산종이 계율종, 자은종이 법상종, 시흥종이 열반종, 중도종이 법성종, 화엄종이 원융종에 해당한다.
이때 선종과 교종의 여러 종파에서 공인 사사(寺社)를 정하고 해당 사찰의 소유 토지와 노비 수를 지정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서울에는 오교양종 각 종파의 사찰을 하나씩만 남기고 지방의 목(牧)과 부(府)에는 선종 1개, 교종 1개 사찰에 대해서만 공인하였다. 당시 서울에 있는 선종과 교종을 대표하는 사찰에는 소유 토지 200결, 노비 100명, 승려는 100명을 두고 그 밖의 사찰에는 토지 100결, 노비 50명, 승려 50명을 두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또 구도인 개성 소재 사찰이 보유한 전지와 노비를 옮겨서 한양의 오교양종 사찰 중 토지와 노비가 없는 사찰에 주도록 하였다(『태종실록』 6년 3월 27일).
다음 해인 1407년에는 11개 종파가 다시 7개로 축소되었는데(『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천태소자종과 법사종은 천태종이 되었고 도문종은 화엄종에 포함되었다. 또 중도종과 신인종은 중신종(中神宗), 총지종과 남산종은 합쳐서 총남종(摠南宗)이 되었으며 조계종, 자은종, 시흥종은 그대로 남았다. 이는 오교양종과 비교할 때 종파 수와 구성에서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세종 즉위 초에도 서울 안의 오교양종 사찰에 대한 노비 배정이 논의되었는데 이때 도성 내에 사찰이 없었던 자은종과 천태종의 경우가 문제가 되었다(『세종실록』 2년 1월 26일). 이어 1424년(세종 6)에는 기존의 오교양종을 선종과 교종으로 통폐합한 선교양종 체제가 출범하였다. 즉 조계종, 천태종, 총남종은 선종으로 합쳐졌고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은 교종으로 통합되었다. 또 기존의 불교 교단 관리와 승려 인사 문제 등을 총괄하는 기구였던 승록사(僧錄司)를 폐지하고 선교양종의 도회소(都會所)를 서울의 흥천사(興天寺)와 흥덕사(興德寺)에 각각 설치하였다. 당시 선종 18개와 교종 18개, 합쳐서 36개의 사찰만이 국가로부터 공인되었고 인정된 승려의 수는 선종 1,950명, 교종 1,800명으로 총 3,750명이었으며, 소유 전지는 선종 4,200여 결, 교종 3,700결, 합쳐서 7,900여 결이 허용되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흥왕사대각국사묘지명(興王寺大覺國師墓誌銘)」
- 권상로, 『조선불교사개설』, 불교시보사, 1939.
- 김영수, 『조선불교사고』, 중앙불교전문학교, 1939.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임제법통과 교학전통』, 신구문화사, 2010.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김영수, 「오교양종에 대하여」, 『진단학보』8, 1937.
- 김영태, 「오교구산에 대하여」, 『불교학보』16, 1979.
- 김용태, 「조선전기 억불정책의 전개와 사원경제의 변화상」, 『조선시대사학보』58, 2011.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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