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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6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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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신옹주 |
한글표제 | 정신옹주 |
한자표제 | 貞愼翁主 |
분야 | 왕족/옹주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효종 |
집필자 | 정주영 |
봉작 | 정신옹주(貞愼翁主) |
출신 | 왕족 |
성별 | 여자 |
출생 | 1582년(선조 15) |
사망 | 1653년(효종 4)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장단 도라산 |
증조부 | 중종(中宗) |
조부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
부 | 선조(宣祖) |
모_외조 | 수원 김씨(水原金氏) : 김한우(金漢佑)의 딸 김인빈(金仁嬪) |
형제 | (오라버니)의안군(義安君), 신성군(信城君), 정원군(定遠君) (남동생)의창군(義昌君) (여동생)정혜옹주(靜惠翁主), 정숙옹주(貞淑翁主), 정안옹주(貞安翁主), 정휘옹주(貞徽翁主) |
자녀 | (1남)서정리(徐貞履) (2남)서정리(徐正履) (3남)서진리(徐晉履) (1녀)김규(金珪)의 처 서미생(徐楣生) (2녀)이명인(李命寅)의 처 서예생(徐禮生) (3녀)심항(沈伉)의 처 서희생(徐喜生) (4녀)권우(權堣)의 처 서지순(徐止順) (5녀)이만웅(李萬雄)의 처 서지효(徐止孝)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신옹주(貞愼翁主)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광해군일기』 5년 5월 17일, 『광해군일기』 5년 6월 1일, 『광해군일기』 5년 6월 21일, 『인조실록』 2년 6월 1일, 『인조실록』 25년 4월 24일, 『효종실록』 9년 2월 14일, 『현종개수실록』 9년 2월 10일, 『현종실록』 9년 2월 14일 |
총론
[1582년(선조 15)~1653년(효종 4) = 72세]. 조선의 제14대 왕인 선조(宣祖)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전생서(典牲署) 주부(主薄)를 지낸 김한우(金漢佑)의 딸인 김인빈(金仁嬪)이다. 친오라버니는 의안군(義安君), 신성군(信城君), 정원군(定遠君)이며, 친남동생은 의창군(義昌君)이고, 친여동생은 정혜옹주(靜惠翁主), 정숙옹주(貞淑翁主), 정안옹주(貞安翁主), 정휘옹주(貞徽翁主)이다. 부마는 달성 서씨(達城徐氏)로 달성위(達城尉)서경주(徐景霌)이다. 인조(仁祖)의 고모이기도 하다.
출생과 혼인생활
1582년(선조 15) 정신옹주(貞愼翁主)는 선조와 김인빈의 사이에서 4남 5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1592년(선조 25) 중추부(中樞府)판사(判事)서성(徐渻)의 아들인 서경주와의 혼례가 결정되었으나, 이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면서 혼례를 올리지 못하고, 선조를 호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한양으로 환도 후 정신옹주와 서경주는 혼인이 이루어졌으며, 부마 서경주는 달성위에 봉해졌다.
정신옹주와 서경주의 장녀 서미생(徐楣生)은 선조의 계비(繼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동생 김규(金珪)와 혼인을 하였다.(『광해군일기』 5년 5월 17일) 그런데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발생하면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모의하였다는 죄목으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과 그 아들 김래(金◎王+來), 김선(金瑄)은 모두 옥사했고, 이 소식을 들은 김규는 감옥에서 자결하였다.(『광해군일기』 5년 6월 1일) 이때 정신옹주의 시아버지 서성(徐渻)도 이에 연루되어 유배를 떠났으며, 정신옹주와 부마 서경주는 남산(南山)의 사가집에 물러나서 살았다.(『광해군일기』 5년 6월 21일) 게다가 선조는 광해군 대신 김인빈이 낳은 신성군(信城君)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했던 적이 있었으므로, 광해군 시대에 김인빈의 자녀인 정신옹주와 부마 서경주는 계축옥사 이후 더욱 위축되어 살았다.
그런 가운데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발생하면서, 정신옹주의 시아버지 서성은 조정으로 돌아왔고, 사위 김규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이후 정신옹주는 친조카인 인조(仁祖)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관향사(館餉使)남이웅(南以雄)이 군향(軍餉)이 모자라서 정신옹주의 봉산(鳳山) 농장의 곡식 2백여 석을 가져다 썼는데, 그 곡식의 값으로 인조(仁祖)가 정신옹주에게 역적의 집 2채를 하사하였다.(『인조실록』 2년 6월 1일) 또한 정신옹주가 장남인 서정리(徐貞履)의 임지에 가려고 하였을 때, 인조는 옹주의 편의를 위하여 정신옹주에게 말을 지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은 수령은 춘분 후에는 가족을 데리고 갈 수 없는 법이 있다며, 사사로운 은혜 때문에 법을 어길 수 없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인조실록』 25년 4월 24일)
정신옹주는 1653년(효종 2)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효종(孝宗)은 정신옹주에게 3년 동안 녹봉을 그대로 지급하라고 하였다.(『효종실록』 9년 2월 14일) 그리고 1668년(현종 9) 정신옹주를 천장(遷葬)할 때에 현종(顯宗)은 초상(初喪)에 쓰는 여러 도구 외에 모두를 예장(禮葬)의 예에 의거해서 거행하라고 하였다. 또 부마인 서경주도 똑같이 예장하도록 하였다.(『현종개수실록』 9년 2월 10일) 이에 대간에서는 다시 예장을 내려주는 규정이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현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현종실록』 9년 2월 14일)
묘소 및 후손
정신옹주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장단(長湍)도라산(道羅山)에 있다.
정신옹주는 서경주와의 사이에서 3남 5녀를 두었는데, 1남은 서정리(徐貞履), 2남은 서정리(徐正履), 3남은 서진리(徐晉履)이다. 1녀인 서미생은 김규와 결혼하였고, 2녀인 서예생(徐禮生)은 이명인(李命寅)과, 3녀인 서희생(徐喜生)은 심항(沈伉)과 각각 혼인하였으며, 4녀인 서지순(徐止順)은 권우(權堣)에게, 5녀인 서지효(徐止孝)는 이만웅(李萬雄)에게 출가하였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만주유집(晩洲遺集)』
- 『백주집(白洲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지두환, 『선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