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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5 판




총론

[1572년(선조 5)∼1640년(인조 18) = 69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삼척부사(三陟府使)와 돈녕부(敦寧府)동지사(同知事) 등을 지냈다. 자는 덕휴(德休)이고, 호는 용은거사(慵隱居士)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좌의정유홍(兪泓)이고, 어머니 강릉 김씨(江陵金氏)는 사직서(社稷署)영(令)김광렬(金光烈)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생원 유관(兪綰)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예조 판서(判書)유여림(兪汝霖)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여 영의정에 추증된 유백증(兪伯曾)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세상을 떠난 후 좌찬성(左贊成)기창군(杞昌君)으로 추증되었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600년(선조 33) 음보(蔭補)로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에 제수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이후 귀후서(歸厚署)별제(別提)에 임명되었다가 사도시(司䆃寺)주부(主簿)를 거쳐 예산현감(禮山縣監)이 되었다.[『한강집(寒岡集)』 권14, 『응천일록(凝川日錄)』 권2]

1608년(광해군 즉위년)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던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 일파가 몰락하고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이 득세하였다. 그러면서 정인홍을 중심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廢母論)이 주창되었고, 이이첨과 허균(許筠) 등이 이를 적극 지지하였다. 그런 가운데 1613년(광해군 5) 대북파는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 당시 8세의 영창대군을 강화도(江華島)로 유배시켰으며, 인목대비의 부친 김제남(金悌男) 등을 사사(賜死)하였다. 그리고 1618년(광해군 10)에는 인목대비를 폐위(廢位)하여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는데, 이때 유대일(兪大逸)은 행호군(行護軍)으로서 폐모론(廢母論)에 동의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10년 1월 4일]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원년) 삼화현령(三和縣令)에 제수되었다가, 1624년(인조 2)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625년(인조 3) 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그해 여름에는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였다.[『국조인물고』] 이후 돈녕부 도정(都正)에 임명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삼화현령과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5년 6월 21일, 인조 5년 12월 4일] 1628년(인조 6) 영변부사(寧邊府使)가 되었다가, 내직으로 돌아와서 중추부(中樞府) 동지사와 돈녕부 동지사 등을 지냈다.[『승정원일기』인조 6년 12월 3일]

그리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서 영해부사(寧海府使)가 되었는데, 자리만 지키고 녹봉만 받음에도 유백증의 아버지라 논책을 면한다는 비판을 받다가 결국 경상도 암행어사이경의(李景義)의 탄핵을 받았다. 이때 이경의는 “영해부사유대일은 정사가 지체되고 간사한 아전들이 용사(用事)하기 때문에 차역(差役)이 고르지 못하여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고 있으니, 조정으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소서.”라고 치계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8년 9월 22일] 이후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과 삼척부사를 역임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10년 4월 9일, 인조 12년 10월 9일] 1640년(인조 18) 윤1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9세였다.[『국조인물고』]

성품과 일화

유대일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기도(器度)가 침착하고 의연하여 바라만 보아도 위인임을 알 수가 있었다.[『국조인물고』]

또 스스로에 대해서는 천성이 게으르고 독서를 좋아하지 않았다. 방안에 조용히 앉아서 교유(交遊)를 사절하였기에 이로써 용은거사로 자호(自號)하였다. 언소(言笑)는 적고 분화(紛華)는 멀리 하였으며, 이해득실에 따라 그 마음을 더럽히지 않았고, 험이(險夷)에 따라 그 지키는 바를 바꾸지 않았다. 마음을 즐겁게 하고 이목(耳目)을 기쁘게 하는 것에는 담백하여 좋아하는 것이 없었고, 오직 술만을 좋아하여 술자리를 만나면 반드시 취하도록 마셨다. 여색을 삼가면서 장차 더럽혀질 듯이 하였다. 음보(蔭補)로 벼슬이 고관(高官)에 이르렀으나 영화로 여기지 않고, 조석으로 한 그릇 밥에 고기 반찬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해하였다고 자평하기도 하였다.[『용은거사전(慵隱居士傳)』]

묘소와 후손

유대일의 묘소는 충주 금천리(金遷里)에 있고,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와 합장하였다.

부인 전주 이씨는 종실인 풍산군(豐山君)이종린(李宗獜)의 딸로 중종(中宗)의 증손녀인데,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유백증이고, 차남은 유중증(兪仲曾)이며, 3남은 유신증(兪信曾), 4남은 유임증(兪任曾)인데 3남과 4남은 일찍 죽었다. 장녀는 정심(鄭沁)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현감신속(申洬)에게 시집갔다.[『국조인물고』]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은거사전(慵隱居士傳)』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잠곡유고(潛谷遺稿)』
  • 『한강집(寒岡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