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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0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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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송치중 |
한글표제 | 송치중 |
한자표제 | 宋致中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광해군~인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정오(正吾) |
호 | 칠광(七狂), 호암(壺巖), 사가정(四可亭)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91년(선조24) 2월 18일 |
사망 | 1643년(인조21) 3월 9일 |
본관 | 여산(礪山) |
주거지 | 전라도 태인(泰仁) 고현리(古縣里) |
묘소소재지 | 전라도 태인(泰仁) 산외면(山外面) 정량동(正良洞)의 언덕 |
증조부 | 송담(宋曇) |
조부 | (양조부)송여량(宋汝良) (생조부)송여후(宋汝厚) |
부 | 송당(宋儻) |
모_외조 | 삼척진씨(三陟陳氏): 진영인(陳永仁)의 딸 |
처_장인 | (첫째부인)평양조씨(平壤趙氏): 조영준(趙英俊)의 딸 (둘째부인)안동김씨(安東金氏): 김상복(金尙宓)의 딸, 이인기(李麟奇)의 외손(外孫) →(자녀)1녀 (셋째부인)남양홍씨(南陽洪氏): 홍종길(洪宗吉)의 딸 →(자녀)5남 4녀 |
자녀 | (1자)송이현(宋以鉉): 최석정(崔錫鼎)의 고모부 (2자)송이석(宋以錫) (5자)송이진(宋以鎭) (1녀)이여정(李汝淨)의 처 (2녀)이시찬(李時燦)의 처 (3녀)오영석(吳永錫)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송치중(宋致中) |
총론
[1591년(선조24)∼1643년(인조21) = 53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의 문신. 자는 정오(正吾), 호는 칠광(七狂) · 호암(壺巖) · 사가정(四可亭)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인데, 주거지는 전라도 태인(泰仁)이다. 아버지는 증 병조 참판송당(宋儻)이고, 어머니 삼척진씨(三陟陳氏)는 승사랑(承仕郞)진영인(陳永仁)의 딸이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어려서부터 문장을 짓는 재능이 뛰어나서 서울에 가서 수학하였다. 1612년(광해군4) 사마시에 3등으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2세였다. 당시는 대북(大北)이 집권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등 정치가 혼란스러웠다. 그는 이상형(李尙馨) 등 두어 사람과 함께 상소하여 폐모(廢母)하자는 논의를 강력히 배척하였으나, 중앙에서 아무런 회답이 없자 마침내 과거(科擧)를 보지 않기로 작정하고, 동지 6인과 더불어 8도 강산을 방랑하면서, 스스로 ‘칠광(七狂)’이라 일컬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금정찰방(金井察訪)에 임명되었다가, 상서시(尙瑞寺) 직장(直長)으로 옮겼고, 1625년(인조3) 군자감(軍資監)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연기현감(燕岐縣監)으로 나갔는데, 직무를 수행하면서 남의 눈에 띄는 별다른 일을 하여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때문에 1627년(인조5) 그가 고을 정사를 아랫사람 서리(胥吏)들에게 맡긴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 뒤에 형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장흥고(長興庫)주부(主簿)를 옮겼고, 호조 좌랑을 거쳐 호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1634년(인조12)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경산현령(慶山縣令)에 임명되어, 이듬해에 부임하였다. 그 뒤에 천안현감(天安縣監)으로 나갔고 사복시(司僕寺)첨정(僉正) 등을 역임하였다. 1643년(인조21) 3월 초9일에 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53세였다.
성품과 일화
송치중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재능이 많고 도량이 넓었으며 학식이 높고 식견이 원대하여, 세속보다 청고(淸苦)한 이상에 뜻을 두었다. 평소에 말이 없고 웃음이 적었는데, 친구를 사귈 때에도 단정한 벗을 택하였다.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친구의 의리를 중하게 여겨서, 아주 가난한 친구가 있으면 자기 전토를 떼어내어 나누어 주었다. 그의 집안은 본래 넉넉하였는데, 분가를 할 적에 모두 누님에게 미루어 선택하게 하였고, 서제(庶弟)들에게 토지와 종을 나누어주는 데도 한 탯줄의 아우와 같이 고르게 하였다. 일찍이 흉년을 맞아 친한 친구가 이웃 고을의 수령(守令)이 되어 쌀을 보내오자, 그는 이를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 집에는 한 톨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산수(山水)를 사랑하여 집 북쪽에 있는 암천(巖川)에서 한가한 날에는 친한 친구들을 불러서 노닐며 술잔도 기울이고 시도 읊조리며 농담도 하니, 마치 속세(俗世)를 벗어난 듯하였다. 처음에 호를 호암(壺巖)이라 하였다가, 정자(亭子)를 ‘사가정(四可亭)’이라고 이름 짓고 나서는 그것을 자호로 삼았다. 그는 사람됨이 바르고 학문도 깊었으므로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대의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이후원(李厚源) · 윤신지(尹愼之) · 최혜길(崔惠吉: 최석정崔錫鼎의 아버지) · 심연(沈演) · 신천익(愼天翊) · 심제(沈癠) · 이상형(李尙馨) 등이 그와 친하게 지냈다. 당시 호남 지방의 인재를 일컬을 때는 그를 으뜸으로 꼽았으므로, 그의 친구들은 그가 너무 빨리 죽었다고 안타까워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태인 산외면(山外面) 정량동(正良洞)의 언덕에 있는데, 장남의 처조카 영의정최석정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명곡집(明谷集)』 권27) 나중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첫째 부인은 평양조씨(平壤趙氏), 둘째 부인은 안동김씨(安東金氏)이고 셋째 부인은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자녀는 5남 5녀를 두었다. 장남 송이현(宋以鉉)은 희릉(禧陵)참봉(參奉)을 지냈는데, 영의정최석정의 고모부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명곡집(明谷集)』
- 『경렴정집(景濂亭集)』
- 『월사집(月沙集)』
- 『상촌고(象村稿)』
- 『청음집(淸陰集)』
- 『농암집(農巖集)』
- 『관봉유고(冠峯遺稿)』
- 『침계유고(梣溪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