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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7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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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배명순 |
한글표제 | 배명순 |
한자표제 | 裵命純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무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수초(遂初) |
시호 | 충숙(忠肅)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97년(선조30) 8월 25일 |
사망 | 1637년(인조15) 2월 15일 |
본관 | 성산(星山) |
주거지 | 경상도 성주(星州) |
묘소소재지 | 경상도 성주(星州) 조곡(祖谷) |
증조부 | 배인범(裵仁範) |
조부 | 배흥립(裵興立) |
부 | 배시망(裵時望) |
모_외조 | 평산신씨(平山申氏): 신천기(申天記)의 딸 |
형제 | (형)배명전(裵命全) |
처_장인 | 의성김씨(義城金氏): 김엽(金曄)의 딸 →(자녀)2남 2녀 |
자녀 | (1자)배상원(裵尙瑗) (2자)배상형(裵尙珩) (1녀)정시무(鄭時武)의 처 (2녀)정노(鄭簵)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배명순(裵命純) |
총론
[1597년(선조30)~1637년(인조15) = 41세]. 조선 중기 인조 때 활동한 무신. 자는 수초(遂初)이다. 본관은 성산(星山)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성주(星州)이다. 아버지는 선무랑(宣務郞)배시망(裵時望)이고, 어머니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주부(注簿)신천기(申天記)의 딸이다. 공조 참판배흥립(裵興立)의 손자이고, 경상도병마사(慶尙道兵馬使)배시량(裵時亮)의 조카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24년(인조2)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서 인조가 강화도(江華島)로 피난갈 때 임금을 호종(扈從)하였다. 이때 후금(後金) 군사를 배후에서 치려고, 인조가 위사(衛士)를 모집하였다. 배명순은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이에 응모하여 병사 3백 명을 이끌고 강물을 건너 안릉(安陵)에서 후금 군사를 습격하고, 그 공으로 오위도총부 도사(都事)로 승진하였다. 1628년(인조6) 공조 좌랑에 임명되어 비변사(備邊司)낭청(郎廳)을 겸임하였다. 비변사에서 건의하여 도총부 경력(經歷)으로 승진하였고, 또 사헌부 감찰(監察)을 거쳐, 군기시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1629년(인조7) 보성군수(寶城郡守)로 나갔다가, 다시 비변사로 돌아와서 특별히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품(陞品)하였다. 1630년(인조8) 전라도 암행어사의 서계(書啓)에서, 보성군수배명순은 부패한 정치가 매우 많다고 보고하였으나, 1631년(인조9) 비변사에서는 배명순을 특별히 발탁하였다. 1630년(인조8) 함경북도 병마우후(咸鏡北道兵馬虞候)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덕원부사(德源府使)로 나갔다. 1633년(인조11) <인성군(仁城君)이공(李珙)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의금부(義禁府)에서 다시 심문을 받았으나, 가담한 혐의가 없어서 풀려났다. 이공은 선조와 정빈민씨(靜嬪閔氏)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1628년(인조6) 능성부정(綾城副正)이희(李僖)가 금원령(錦原令)이탁(李倬) 등의 무리가 그를 추대한다고 고발하여, 혹독한 심문을 받다가 죽었다. 그런데, 1632년(인조10) 이희가 다시 배명순이 그 무리라고 고발하는 바람에 배명순이 심문을 받았던 것이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덕원부사배명순은 영장(營將)으로 임명되어 남병사(南兵使: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따라서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켰다. 그때 인조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청나라 군사에게 포위당한 지 40여 일이 되었으나, 남병사 · 북병사(北兵使: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는 모두 양근(楊根)에 군사를 주둔한 채 청나라 군사가 두려워 진군하지 못하였다. 배명순은 비분강개하여 결전을 벌이려고 결심하였으나 주장(主將) 남병사가 저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홍타이지에게 항복하고 도성으로 돌아오니, 제장들도 각자 군병을 해체하고 본진으로 돌아갔다. 덕원부사배명순은 남병사를 따라서 군사를 이끌고 함경도로 돌아가다가, 북로(北路)를 따라서 돌아가던 청나라 군사와 철령(鐵嶺)에서 만났는데, 청나라 군사가 싸우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 배명순이 석왕사(釋王寺)에서 군사를 쉬게 하면서 적을 동정을 살피자고 하였으나 주장 남병사는 군사들을 이끌고 곧장 안변(安邊)으로 하였다. 배명순이 영장(營將)한기영(韓耆榮)에게 남산역(南山驛)에서 군사를 주둔하고 동정을 살피자고 하였으나 남병사는 강행군을 계속하다가 남산역 인근에서 청나라 복병의 습격을 받았다. 그 날(1637년 2월 15일), 41세의 배명순은 “한 번의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고 장렬히 싸우다 죽었고, 남병사가 이끌던 군사도 모두 전사하였다.
성품과 일화
배명순의 체격은 장대하고 수염이 훌륭하였다. 무인 출신이었으나 평생 선비를 사랑하였고 예(禮)를 좋아하였다. 군중(軍中)에 있을 때에는 오직 성실과 신의(信義)로써 사졸(士卒)들을 대하였으므로, 싸울 때에는 사람들의 사력(死力)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장부란 뜻을 사방(四方)에 펴고 죽는다면, 죽은 다음에 말가죽으로 몸을 싸서 돌아오더라도 그만이다.” 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묘소는 경상도 성주(星州) 조곡(祖谷)의 언덕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미수(眉叟)허목(許穆)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고, 함경도 덕원(德源)에 추사비(追思碑)가 있다.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부인 의성김씨(義城金氏)는 예빈시 봉사(奉事)김엽(金曄)의 딸로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차남 배상형(裵尙珩)은 함경북도 병마우후(咸鏡北道兵馬虞候)를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미수기언(眉叟記言)』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동토집(童土集)』
- 『도곡집(陶谷集)』
- 『여호집(黎湖集)』
- 『석재고(碩齋稿)』
- 『연재집(淵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