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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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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강징 |
한글표제 | 강징 |
한자표제 | 姜澂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예술·체육인/서예가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성종~중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언심(彦深)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66년(세조12) |
사망 | 1536년(중종31) |
본관 | 진주(晉州) |
증조부 | 강회중(姜淮仲) |
조부 | 강안복(姜安福) |
부 | 강이행(姜利行) |
모_외조 | 양천허씨(陽川許氏): 허손(許蓀)의 딸 |
처_장인 | 오천정씨(烏川鄭氏): 정미(鄭湄)의 딸→(자녀)5남 |
자녀 | (1자)강희(姜僖) (2자)강의(姜儀) (3자)강억(姜億) (4자)강엄(姜儼) (5자)강위(姜偉) (서1자)강준(姜俊) (서2자)강임(姜任) |
유명자손 | 강몽서(姜夢瑞), 강응서(姜應瑞), 강명서(姜命瑞), 강창서(姜昌瑞)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강징(姜澂) |
총론
[1466년(세조12)~1536년(중종31) = 71세]. 조선 초기 성종(成宗)~중종(中宗) 때에 활동한 문신, 서예가. 자는 언심(彦深),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충정공(忠貞公)허종(許琮)의 조카인데,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외삼촌 허종이 데려다가 가르쳤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4년(성종25)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 1497년(연산군3) 홍문관(弘文館)저작(著作),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다. 1500년 승문원(承文院)교리(校理), 예문관부응교(副應敎),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 홍문관직제학(直提學)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 사이 8년 동안 경연관(經筵官)으로서 강독을 담당하였는데 언어가 통달하고 생각이 간절하니, 좌우의 사람들이 경청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1503년(연산군9) 사헌부장령이 되었고, 홍문관직제학·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1504년(연산군10)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우승지(右承旨)로 승진하였다. 이때 연산군(燕山君)의 음학(淫虐)이 날로 심해졌는데, 그는 사냥에 대해 연산군에게 간하였다가 낙안군(樂安郡)에 유배되었다.
중종 시대 활동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고 그는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훈되었다. 그리고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를 거쳐 1507년(중종2)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508년(중종3)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다가, 1512년(중종7)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520년(중종15)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중추부동지사, 승문원제조(提調)를 역임하였다. 1522년 형조참판으로 임명되었다가, 나가서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역임하였다. 1527년 공조(工曹)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중추부첨지사(僉知事), 지사(知事)로 승진하였다. 1536년(중종31)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71세였다.
당대 제일의 서예가
홍문관에서 명도잠(明道箴)을 바치자 중종이 그에게 이것을 8폭 병풍에 베껴 써 바치도록 하였다. 중종은 그의 필법이 힘차고 아름답다고 칭찬하고, 병풍을 침전에 두고 감상하였다. 1521년 명나라 세종(世宗)가정제(嘉靖帝)가 즉위하자, 진하사(進賀使)로서 중국 북경에 갔는데, 명나라 황제와 예부(禮部)의 관리들이 그의 필체가 아름다운 것에 감탄하였다. 그리하여 다투어 그의 글씨를 얻으려 하였고, 황제는 그에게 명나라 문관 4품의 반열에 서도록 특별히 허락하였다. 평소에 시(詩)를 잘 지었는데, 노년에 지은 것이 더욱 운치가 있었다. 그의 필법은 본래 힘차고 아름다워 명성이 당대에 제일이었는데, 지금 「익혜공(翼惠公) 정난종 신도비(鄭蘭宗神道碑)」와 「예조 참의 최한정 비(崔漢楨碑)」등의 글씨가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단아하고 행실이 점잖았으며, 항상 글 짓고 글씨 쓰는 것을 스스로 즐겼다. 또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비록 한가히 집에 있을 때라도 반드시 엄숙하게 단정히 앉아서 구차스럽게 말하지 않았다. 자제들이 배운 바를 질문하면 기뻐하는 기색으로 마음을 터놓고 말하였으나 말이 사사로운 데에는 미치지 않았다. 사람을 접대함에도 한결같이 너그럽고 대범하여, 비록 부리는 노비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또한 성내지 않았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음애집(陰崖集)』
- 『충재집(冲齋集)』
- 『모재집(慕齋集)』
- 『해동야언(海東野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