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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1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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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권감 |
한글표제 | 권감 |
한자표제 | 權瑊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정치·행정가/공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성종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차옥(次玉) |
봉작 | 화천군(花川君) |
시호 | 양평(襄平)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23년(세종5) |
사망 | 1487년(성종18) |
본관 | 안동(安東)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광주(廣州) 서면(西面) 고과천(古果川) |
증조부 | 권흥(權興) |
조부 | 권참(權參) |
부 | 권극화(權克和) |
모_외조 | 양주조씨(楊州趙氏): 조계생(趙啓生)의 딸 |
형제 | (형)권기(權琦) |
처_장인 | (첫째부인)유씨(柳氏): 유자해(柳子偕)의 딸 →(자녀)무후 (둘째부인)김씨(金氏): 김계권(金係權)의 딸 →(자녀)3남 |
자녀 | (1자)권만형(權曼衡) (2자)권응형(權應衡) (3자)권순형(權順衡)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권감(權瑊) |
총론
[1423년(세종5)∼1487년(성종18) = 65세]. 조선 전기 세종~성종 때에 활동한 문신. 세조의 공신으로서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졌다. 자는 차옥(次玉)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권극화(權克和)의 아들이고,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조계생(趙啓生)의 외손자이다.
세조를 도운 공신
세종 말년에 음보(蔭補)로서 사직서(社稷署)녹사(錄事), 사온서(司醞署)주부(主簿)에 제수되었고, 1450년(문종즉위)에 사마시(司馬試) 합격하여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成宗實錄)』권감의 졸기에는 경태 경오년-문종즉위년에, 그의 행장에는 경태2년-문종원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것으로 적고 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도운 공으로, 좌익 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에 책훈되었다. 1457년(세조3) 한성판관(漢城判官)이 되었다가, 1458년(세조4)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고, 이어 호조 정랑으로 옮겼다. 1465년(세조11) 봉상시(奉常寺)판사(判事)를 역임하고, 1467년(세조13) 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가서 동부승지(同副承旨) ·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서 마침내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세조 말년에 한명회(韓明澮)가 영의정으로 있던 시기에 오랫동안 도승지를 맡아보았다. 세조가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경을 간행하자, 도감사(都監使)에 임명되어 이를 감독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사(佛事)에도 자주 참석하였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다음에도 도승지에 그대로 유임되었다. 그때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추충 정난 익대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3등에 책훈되고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졌다. 1469년(예종1) 이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성종 시대 활동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청승습사(請承襲使)로서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1등에 책봉되었다. 1472년(성종3)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고, 다음해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옮겼다. 1478년(성종9) 의정부 좌참찬으로 승진하고, 1481년(성종12) 평안도체찰사(平安道體察使)를 역임하고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가, 1482년 경기도 진휼사(賑恤使)를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1483년(성종14)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다가, 화천군(花川君) 겸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에 임명되었다. 1485년(성종16)에는 전라도 진휼사로 나가서 빈민을 구제하였다.
무덤과 사평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서면(西面) 고과천(古果川)에 있다. 첫째 부인은 유자해(柳子偕)의 딸로 자식이 없고, 둘째 부인은 김계권(金係權)의 딸로 자녀는 아들이 셋인데, 권만형(權曼衡) · 권응형(權應衡) · 권순형(權順衡)이다.
권감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용의(容儀)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면서도 강직하였다. 또한 올바른 지조를 지키고 남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왕대에 걸쳐 벼슬을 역임하는 동안 정사를 밝게 살피고 행동을 곧게 처신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리하여 그가 세상을 떠나자 사림(士林)에서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성종실록(成宗實錄)』권감의 「졸기(卒記)」에서는 그에 대하여 “경저리(京邸吏) 당상관이 되어서 경저의 땅을 빼앗아 많이 차지하였는데, 그가 죽고 나서 사람들이, ‘권감이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경저의 집들을 모조리 삼키고야 말았을 것이다.’라고 비난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朝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사가집(四佳集)』
- 『용재총화(慵齋叢話)』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해동역사(海東繹史)』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