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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4 기준 최신판



대동미 총액 중 경상납과 영읍소용을 제외한 몫.

개설

저치의 단어 자체가 가진 뜻은 유치(留置)와 비슷하지만, 저치와 유치는 구분되어 사용하였다. 저치미(儲置米)는 예비비를 뜻하는 여미(餘米)와 같은 뜻으로 사용된 반면, 유치미(留置米)는 『대동사목(大同事目)』에서 각읍소용(各邑所用)과 저치미를 합해서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대동사목』에 따르면 백성에게 걷은 쌀·포(布)는 크게 중앙 각사로 올라가는 경상납분과, 각 군현의 관수(官需)로 쓰이는 영읍소용, 예비비인 저치미로 나뉘어 처리되었다. 경상납과 영읍소용이 경상비라면, 저치미는 예비비에 해당하였다. 저치미의 목적은 대동법의 목적과 연결되었다. 즉, 대동미(大同米)를 거두어들인 후 대개는 추가적인 징수가 발생하였는데, 그것이 민결(民結) 침탈로 이어지지 않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저치미였다.

저치미는 현물 공납제에서 가렴(加斂)의 단서가 되었던 쇄마(刷馬)와 과외(科外)의 역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대동법 운영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흉년이었다. 현물 공납제에서와 달리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는 백성들에게 걷는 대동미의 액수를 줄여 주기도 하였다. 그 줄어든 액수로 인한 부족분은 저치미로 충당하였다. 기록적인 흉년이었던 1671년(현종 12)를 시작으로 대동미를 줄여 준 사례는 27회에 이르렀다. 예비비 역할에 더하여 저치미의 또 하나의 기능은 각 군현의 경제적 불균등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대동법에서는 각 군현의 불균등을 보완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각 군현의 전결수에 따라 영읍소용과 저치미의 크기를 차등 있게 정하였던 것이다.

한편 저치미는 지출뿐 아니라 보충에 대한 규정도 있었다. 병선(兵船)은 5년마다 새로 건조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이 기간을 넘겨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미리 책정되었던 예산은 저치미로 이속(移屬)되었다. 각 군현의 감사지공미(監司支供米)도 지출되지 않았을 때, 저치미로 귀속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저치미가 일종의 저수지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즉, 저치미는 각 군현에서 집행되는 항목들의 예산상 과부족이나 집행 유무에 따른 예산 변동을 조절하였다.

변천

『속대전』「호전(戶典)」 요부(徭賦) 조에는 “저치미를 대신 바치는[代捧] 자는 마음대로 빌려준 것에 대하여 치죄하는 천대율(擅貸律)로 논죄하며, 그 수를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은 자는 도배(徒配)하고, 또 모자라게 된 수량을 보충할 때까지 금고(禁錮)한다.” 하고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교묘한 이유를 들어 저치미 운영에 많은 폐단을 만들었다. 예컨대 전병선저치(戰兵船儲置)는 원래 해안에 있는 여러 읍들의 대동 저치미 중 변란에 대비하기 위하여 군량미로 남겨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수령들이 묵은 곡식을 빌려주고 새 곡식을 받는다[改色]는 핑계로 이를 모두 나누어 주고 이자를 취하여 많은 폐단을 낳았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김옥근, 『조선 왕조 재정사 연구 Ⅲ』, 일조각, 1988.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 이정철, 「대동미·포의 구성: 『호서대동절목』·『전남도대동사목』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19, 2005.
  • 六反田豊, 「大同法における 「留置米」 「余米」 「儲置米」 槪念の檢討」, 『東洋史硏究』 50-3, 1991.
  • 六反田豊, 「『嶺南大同事目』 と慶尙道大同法」, 『朝鮮學報』 131,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