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사(支天寺)"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2:4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지천사 |
한글표제 | 지천사 |
한자표제 | 支天寺 |
관련어 | 태평관(太平館), 기양법석(祈禳法席), 고려대장경판(高麗大藏經板), 장의사(藏義寺), 마리지천도량[摩利支天道場], 흥천사(興天寺), 마리지천보살다라니경[摩利支天菩薩陀羅尼經], 화엄종(華嚴宗)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
집필자 | 한상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지천사(支天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6년 5월 15일, 『태조실록』 6년 11월 15일, 『태조실록』 7년 1월 22일, 『태조실록』 7년 2월 3일, 『태조실록』 7년 2월 14일, 『태조실록』 7년 2월 18일, 『태조실록』 7년 5월 10일, 『태조실록』 7년 5월 12일, 『태종실록』 8년 10월 21일 |
조선초에 국가의 기양법석이 자주 개최된,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에 있던 절.
개설
지천사(支天寺)의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말 500명이 거주하는 대찰이었다. 조선 태조대에 이곳에서 기상이변 등의 천변을 물리치는 법회를 자주 열었다. 1408년(태종 8) 절이 중국 사신의 숙소인 태평관과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폐사되었다.
내용 및 변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말 500명에 달하는 승려가 주석하였다. 절은 태평관(太平館)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태평관은 조선초기에 중국 사신들이 머물던 숙소로, 숭례문에서 가까운 곳인 플라자호텔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지천사에 대한 기록은 주로 태조대에 집중되어 있다. 먼저 1397년(태조 6) 5월 어떤 별이 왕량성(王良星)에서 나와 북쪽으로 흐르자, 재앙을 없애는 법석(法席)을 지천사에서 열었다(『태조실록』 6년 5월 15일). 이 무렵 왜구가 황해도 해주(海州) 앞바다에 나타나 민심이 소란스러워지는 일도 있어 이를 무마하려는 목적이었던 듯하다. 같은 해 11월에는 태조가 흥천사(興天寺)에 갔다가 지천사에도 행차하였다(『태조실록』 6년 11월 15일). 이듬해 1월에는 절에서 도승통(都僧統)설오(雪悟)를 만나 별의 변고를 물리치는 성변기양법석(星變祈禳法席)을 열도록 하였다(『태조실록』 7년 1월 22일). 2월에도 지천사를 비롯하여 장의사(藏義寺)·안암사(安巖寺)·왕흥사(王興寺)의 네 곳에서 기양법석을 열었다(『태조실록』 7년 2월 3일). 14일에는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오사충(吳思忠)을 장의사에 보내 십이인연(十二因緣) 법석을 열었고, 지천사에서는 기양법석을 또 개설하였다(『태조실록』 7년 2월 14일).
이와 같이 지천사는 장의사와 함께 국가의 재난을 물리치려는 법회의 중심 사찰이었다. 국가의 공식적인 법회였으므로 소요 재원은 모두 국가에서 지급되었다. 그러자 법석의 재물을 사적으로 탐하는 자가 있어 처벌하기도 하였다(『태조실록』 7년 2월 18일).
태조는 불교 신앙이 돈독하여 조선을 건국하면서 무학자초(無學自超) 등의 도움을 받는 등 친불교적인 입장이었다. 고려 왕족의 영혼을 천도하는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열기도 하였다. 건국초에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자 이를 불력(佛力)으로 극복하기 위한 법회를 자주 열면서 지천사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지천사라는 이름은 『마리지천보살다라니경(摩利支天菩薩陀羅尼經)』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 경을 외우며 천변과 재난 등을 물리치기 위한 밀교적 법회가 마리지천도량이다. 일찍이 고려시대에 자주 개설되었으므로 건국초의 조선 사회에 익숙한 신앙 의례였다.
1398년(태조 7) 5월 강화도에 있던 고려대장경판이 잠시 지천사로 들어왔다. 강화도는 왜구의 잦은 노략질에 고통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곳 판당에 있던 고려대장경판도 위험한 지경이어서 결국 합천 해인사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다. 5월 10일 대장경판은 서해와 한강을 거쳐 용산강에 도착하였다(『태조실록』 7년 5월 10일). 용산강은 지금의 원효대교 부근으로 추정되는데, 이 날은 장마철이라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를 피하기 위해 11일까지 이틀간 이 곳에서 머물던 대장경을 12일 지천사로 운반하였다. 먼 길이 아니었지만 2,000명의 군사가 동원되었다. 의장대가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앞에서 인도하고 오교·양종의 승도들이 불경을 외우며 행진하였다(『태조실록』 7년 5월 12일). 대장경판은 이듬해인 1399년(정종 1년) 1월 해인사에 도착해 있었다.
지천사는 1408년(태종 8)에 폐사되었다. 중국 사신과 관리들이 드나드는 태평관과 가까워서 사찰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당시 화엄종에 속해 있던 지천사의 토지와 노비를 모두 흥천사로 이속시키고 전각은 관리들의 관사로 삼았다(『태종실록』 8년 10월 21일).
참고문헌
- 『동문선(東文選)』
- 김영수, 「해인장경판에 취하야-이안은 정축년 용재는 백화목」, 『일광』8, 일광사, 1937.
- 우정상, 「지천사고」, 『조선전기불교사상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1985.
- 한상길, 「고려대장경의 해인사 이운 시기와 경로」, 『불교학연구』30, 불교학연구회, 201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