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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4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사족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모임.

개설

향회(鄕會)는 시기에 따라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주로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을 중심으로 한 향회가 구성되었다. 즉 16~17세기에는 향안(鄕案)에 이름이 수록된 양반, 즉 향원들로 향회가 구성되었다. 또한 향원 가운데에서 뽑힌 좌수(座首)나 별감(別監) 등 향임(鄕任)들의 상설적인 모임을 향회라고 하였다. 조선전기에 향촌 사회에서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을 보좌하기 위하여 설치된 유향소(留鄕所)는 치폐를 거듭하면서 16세기에는 국가의 지방 지배에 있어서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즉, 왕과 수령이라는 국가 행정적 지배 기구의 서열이 주요한 국가의 지방 지배의 축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역 출신의 관료를 중심으로 형성된 경재소와 재지사족들로 구성된 유향소의 계통은 사족 자치적인 지배 기구의 서열을 형성하였다.

유향소는 유향품관(留鄕品官)들을 중심으로 좌수와 별감을 선출하여 수령의 제반 업무를 보좌하면서 향정(鄕政)에 관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수령과 유향소의 관계는 압도적인 국가 권력 앞에서 대등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사족 세력이 강한 곳에서는 자율적으로 유향소를 구성하면서 수령의 권력을 견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유향소는 재지사족, 즉 유향품관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일정한 자격을 가진 향원들로 구성된 유향소를 청사로 한 이 조직은 향안에 올라 있는 향원을 정규 회원으로 간주하여 운영되는 자치 조직이었다. 이들 향안 조직을 당시에는 흔히 ‘일향(一鄕)’ 또는 ‘향중(鄕中)’이라고 불렀다. 사료에 향중 또는 일향으로 표현되는 향회는 향안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으로, 재지사족 가운데 선발된 소수의 인원으로 자치 조직을 구성하며 한 고을을 대표하는 권한을 가진다. 수령을 보좌하는 유향소를 통하여 향정에 관여하였다.

지역에 따라서 구성은 다르지만, 전라도 장수 지방에서는 여러 명으로 구성된 향촌의 의사 결정 기구로서의 향중과 그 집행 기구로서 좌상(座上)-공사원(公事員)-향유사(鄕有司)가 있었으며, 향중에서 여러 가지 향규와 완의를 정하여 향촌 사회를 자치적으로 운영하였다. 남원 지역은 시기에 따라 변화가 보이지만, 향회라고 하는 향촌의 의사 결정 기구가 있고, 그 대표 기구로서 향로(鄕老)-향장(鄕長)-향유사라는 조직이 있었다. 향유사는 후일 직월(直月)로 바뀐다. 경상도 김해의 경우에는 10여 명의 향원들의 모임인 향중이 있고, 향중을 대표하는 향수(鄕首)가 있었다.

향중이라고 하는 향안 조직이 국가에 의해 인정된 것은 아니지만, 수령에 의해 인정된 유향소를 통하여 수령을 보좌하고 견제하여 향촌의 의사를 대변하는 기능을 한 것으로 한국 전근대 사회의 자치 조직의 모습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조선후기 향촌 사회에 있어서 향청(鄕廳)의 위상은 매우 위축된 것이었다. 19세기 군현도(郡縣圖)에 그려진 읍치 지역의 상세도를 보면, 향청은 수령의 집무소인 동헌 옆에 위치하여, 향리들의 집무소인 작청(作廳)과 마찬가지로 수령의 보좌 기구 또는 사역 기구로 전락하였다.

내용 및 특징

향회의 구조와 성격·기능·운영 등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향회의 역할은 대개 향임 선출과 향안에의 등록, 사족 내부 결속, 이서층(吏胥層)의 임면, 부역 체제 운영에의 간여 등이었다. 이를 통해 사족의 공통된 이해를 지키고 수령의 권한을 견제하고 이서층을 통제하였으며 민(民)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즉 사족이 한 군(郡)을 지배할 수 있었던 실질적인 최고 기구였다.

향회는 대회(大會)와 소회(小會) 등 여러 모임이 있는데, 참석 범위는, 대회의 경우는 전 향원이 다 모이고 소회의 경우는 임원들만 모인다. 향회는 새 향원을 향안에 입록시키거나 거부하는 권한인 향적권(鄕籍權), 향임(鄕任)을 수령에게 추천하는 권한인 향천권(鄕薦權), 그리고 조세 및 부역·환곡 등에 대한 조정권 등을 갖는다. 18세기 이후 새로이 등장한 서얼(庶孼)과 부민(富民) 등 신향(新鄕)들은 기존의 여러 권한을 갖고 있는 구향(舊鄕)들에 대하여 도전을 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각 지방에서는 향전(鄕戰)이 일어나게 되었다.

지역에 따라 재지사족들 내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자율적인 자치 질서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재지사족과 국가 권력을 대표하는 수령을 매개하는 향청을 읍치 지역 내에서 보았을 때에 그것은 작청(作廳)이나 군교청(軍校廳)과 같이 수령의 하수 기구 중 하나로 전락된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그 규모나 위상은 위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이 『목민심서』에서 향청의 대표인 좌수를 관속(官屬)의 하나로 파악하였던 것도 당시 향청의 위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향회는 조선후기 사족 지배 체제가 무너지면서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수령의 단순한 부세 자문 기구로 성격이 바뀌고, 구성원도 사족에서 이향층(吏鄕層)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사족으로 구성된 향회에서 선출되던 향임을 수령이 임면하게 되었고, 향회의 통제 아래 있던 이서층의 임면권도 수령에 의하여 독자적으로 행사되었다.

이향층 중에서 향은 향임층 또는 향족을 의미한다. 이들은 요호(饒戶)·부민(富民)으로서 축적된 부를 기반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새로운 지방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지방에서는 이들도 양반으로 인정되었다. 이들이 향임에 임명될 때 수령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에 사족의 수령에 대한 견제나 이서층에 대한 통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수령을 보좌하는 기구로서 향회도 있었지만 점차 수령과 향회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향층은 새로운 지배 세력이었지만 전통적인 양반들처럼 면세의 특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조세를 부담하는 계층이었다. 이들이 참여하고 있는 향회에서 바로 자기들이 부담해야 할 각종 조세 및 액수·수취 방법 등을 처리해야 했다. 중앙 정부와 수령들의 요구가 지나치게 되면 향회는 협조적이던 태도를 바꾸어 저항하게 되었다. 이러한 향회는 일반 민인(民人)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어서 수령의 지나친 조세 수탈에 대해 향회가 저항하지 않을 경우 별도로 민회(民會)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중앙집권적 전제국가에서 전체적으로 민의 자율적인 영역은 위축되어 간다고 할 수 있다. 16~17세기에 전국적 규모의 외란을 겪고도 재지사족의 자율적 질서를 만들어 간 것은 조선 왕조 사족 지배 체제의 유연성이라고 할 수 있으나 점차 재지사족의 자율적 영역은 위축되고 국가적 지배 질서만이 확대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신분적 질서가 무너지고 경제적 질서가 우선시되는 상황에서 민란이 발생하고 농민전쟁이 일어나는 등 19세기 국가 질서의 위기가 도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변천

갑오경장 때에는 부민층이 주도하는 향회를 법제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즉 1894년 7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의안(議案)에 의하여 향회를 제도화하려 하였다. 이때의 향회는 10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던 조세 금납화를 비롯한 새로운 조세 제도를 담당할 지방 기구였고 탁지부(度支部)의 하부 기구였다. 즉 향회에서 뽑은 향원이 세금(結錢과 戶錢)을 거두고 그 지방의 재정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일본의 개입에 의한 이른바 2차 갑오경장 단계에 이르러 좌절되었다. 국가에서는 1895년 11월 「향회조규(鄕會條規)」를 마련하여 다시 향회를 설치하려 하였다. 각 지방에 이회(里會)·면회(面會)·군회(郡會) 등 세 등급의 향회를 설치하되, 이회는 30집을 기준으로 동네마다 두고 한 집에서 한 사람씩 참석할 수 있었다. 면회는 면 단위에 두어 각 이회에서 선출한 대표자들로 구성되며, 군회는 군 단위에 두고 면회에서 뽑은 대표자들로 구성되었다.

신분제의 폐지와 함께 참정권이 확대되어 신분을 기준으로 참정권을 제한하지 않게 되었다. 이 회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한 집에서 한 사람씩 참석할 수 있었고, 선거권과 피선거권에서 신분적 제한을 철폐하였다. 회의석의 서열은 부역의 많고 적음으로 정하였다.

향회는 교육·산업·공동작업·세금에 관한 사항 등을 처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군수로부터 세금 징수권을 빼앗아 향회에서 뽑은 민선 대표에게 주어 세금을 거두게 하였다. 비록 세금 액수를 결정하는 데 납세자의 의사를 직접 반영하는 제도는 아니었으나, 일단은 세금 징수 과정에서 발생되는 각종 부정부패를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었다.

향회에서 결정한 사항은 군수·면장·이장이 언제든지 거부할 수 있어서 이회·면회·군회가 모두 군수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행정 체계는 군 단위까지는 중앙에서 장악하고 중앙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면 단위 이하에서 ‘자치’를 하는 것이었고, 이 경우 향회는 군수의 행정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향회 체제는 조선후기 이래 지방 사회에서 발전해 왔던 자치 체제가 신분제의 붕괴에 의한 새로운 민주주의적 지향으로 법제화되는 과정이었다. 이제 양반 사족층은 신분제나 과거제의 폐지로 지금까지 누려왔던 여러 가지 정치적·경제적 특권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런 변화를 지방 사회의 차원에서 제도화시킨 것이 근대 이후의 향회 체제였다.

참고문헌

  • 망원한국사연구실, 『1862년 농민항쟁』, 동녘, 1989.
  • 김인걸, 「조선 후기 향촌사회 변동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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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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